Vol3_2B

Màu nền
Font chữ
Font size
Chiều cao dòng

***
“어.”
“어?”
소파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앉아 있는 요한을 발견한 정태의가 의외라는 감탄사를 중얼거리자, 요한은 별로 의외롭지는 않지만 정태의의 말에 대답이나 해 준다는 듯 그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대답했다.
“네가 어쩐 일이야, 책을 다 보고.”
정태의는 요한이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소파의 건너편, 일인용 카우치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가 요한과 마주치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식당 홀 아니면 지하의 휴게실. 혹은 아주 가끔 복도에서 스치는 정도였다.
적어도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이 공동서재에서 그와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동서재라고는 하지만, 개인 서재보다 조금 더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사이로 군데군데 안락한 카우치가 놓여 있는, 책이 좀 많은 휴게용 홀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실제로도 책을 읽으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 수와 푹신한 카우치에 몇몇이서 모여앉아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러 오는 사람들 수가 비슷해서, 지금 정태의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서가 두셋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자리에도 두세 명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책읽기만으로 따지자면 과히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편하게 늘어져 앉아 시간을 때우며 책장을 넘기기에는 좋았다. 게다가 분위기가 그런 탓인지, 크리스토프의 개인
서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통속소설류가 제법 많았다.
지금도 정태의는, 얼마 전에 요한이 식당에 던져 두고 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 넘기다가 결국 뒷권을 찾게 된 통속소설 한 권을 손에 쥐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대체 어디서 갖고 왔는지 알 수도 없는 기괴한 제목의 책을 손에 들고 소파에 뻗어 있었다.
“「이제 당신도 밤을 말할 수 있다, 바디랭귀지―이국의 뜨거운 미녀들」. ……도대체 뭐하는 책이냐, 그건.”
“다음 휴가를 알차게 보내려면 미리 대비를 해야지. 유비무환 모르나, 유비무환?”
무슨 대비를 어떻게 하려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무난하게 화제를 돌리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 온다고 다들 분주하던데.”
정태의가 묻자 요한은 귀찮다는 듯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괜찮아. 윗자리에 앉은 녀석들이나 바쁘지.”
이럴 때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면 승계를 애시당초부터 포기했던 보람이 없지 않겠어, 하고 태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요한이었다.
이 게으른 남자야말로 사실은 진정한 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속으로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
오늘은 새벽부터 뭔가 분주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며칠 전부터였지만, 오늘은 한층 더했다.
며칠 전부터 말로만 들었던 그 귀한 손님이 온다는 날이 오늘이었던 것이다.
리야드에서 온다고 했다.
리야드.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찾아오는 귀한 손님이시지.’라고 말꼬리를 약간 끌어서 느릿하게 말하며 미묘하게 웃음 짓던 일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웃음 안에 성가시다는 기색이 담겨 있는
걸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리야드라. ……설마하니 대뜸 대테러 포획단이 오는 건 아니겠지.
“차관 변제의 최종 협상이라니까 뭐,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은 바쁘니 직접 오지 않을 테고 그 바로 아래쯤 있는 놈들이 와서 서로 속셈을 캐어보지나 않겠어?”
그런 다음에 위에 보고를 하면 그제야 마지막 결정을 내리겠지, 하고 요한은 정태의의 고민을 꿰뚫어 보았을 리도 없는데도 중얼중얼 태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고개를 비스듬하게 꼬고 있다가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릭은 예전에 리야드에 폭격을 했었잖아. 그런데 그쪽 손님과 마주쳐도 괜찮나?”
“아―지금은 특수 상황이잖아. 승계 결정일이 코앞인데, 타르텐에 귀빈으로 와 있는 놈에게 외부에서 어떻게 손을 뻗겠어. 노린다 해도, 볼일 다 마친 뒤 타르텐에서 나가는 순간을
노리겠지.”
게다가 특전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차관 관련 실무자 두세 명이 온다고 해서 저놈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을까, 하고 요한은 손을 내저었다.
그 말도 맞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카우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멀리 중동에서 오시는 그 귀빈들, 얼른 볼일 마치고 가 주셨으면 좋겠군.”
“그래봐야 윗자리 놈들이나 바쁘지 우리 같은 한량들은 상관없다니까. 아……, 하긴 크리스가 바빠지면 너도 같이 바빠지려나?“응? 아, 나는 아냐. 그 녀석이 요즘 낮에는 리하르트랑 붙어 다니는 동안 오히려 나는 집에서 한가해졌지. 내가 타르텐의 업무를 보는데 따라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실제로 지금도, 다른 때였더라면 크리스토프가 시킨 잡일더미에 파묻혀 있었을 정태의는 매우 한가하게 이렇게 노닐고 있었다. 게다가 중동에서 손님이 와서 그들이 바빠진다면
자연히 정태의는 더 한가해질 듯했다.
양 사이드에서 고뇌의 씨앗을 던져 주는 두 남자, 일레이와 크리스토프가 없으니 낮 시간이 몹시 평화로웠다. 이것도 제법 괜찮다.
“크리스토프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정태의는 태평하게 혼잣말을 하며 책장을 펼쳤다.
요한의 말마따나 귀빈의 도래로 바빠진 윗자리 놈들의 대열에 끼게 된 크리스토프는, 오늘 아침에도 해가 비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아침 일찍 나가는 리하르트의 스케줄에 맞춰 다녀야 하게 된 크리스토프는, 아침마다 죽으려 했다. (혹은 죽이려 했다)
저혈압이라서 늘 아침 느지막이, 아침과 점심 사이의 애매한 시간에야 겨우 힘들게 일어나던 크리스토프는 오늘도,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 옆에서 정태의가 혀를 차며 흔들어
깨워도 도무지 눈을 뜨질 못했다.
죽을 것 같다면서 해쓱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깨운 사람은 결국 리하르트였다.
요 며칠 주욱 그렇다.
리하르트는 정태의보다 훨씬 쉽고 편하게 크리스토프를 깨웠다.
어렵지 않았다. 그가 외출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모습으로 크리스토프의 방 안에 들이닥치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방문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한 적 없어. 당장 나가.’
‘당장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으면 구둣발로 침대를 밟고 올라가서 끌어낸다.’
‘……. 아침부터 피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봐.’
미간에 깊이 주름을 새기며 리하르트에게 대꾸하는 동안, 크리스토프는 그럭저럭 일어날 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가 침대에서 나와 힘없는 걸음으로나마 욕실로 가면, 그제야 리하르트는 싸늘한 얼굴로 다시 방에서 나갔다. 머쓱하게 서 있는 정태의에게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아침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고.
“오늘도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나가던데, 지금쯤은 괜찮겠지.”
그렇게 인상을 써서야 밤마다 웃는 연습을 해 봐야 허사라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정태의의 건너편 자리에서 요한은 열심히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에 줄을 그어가면서 대꾸한다.
“밤이면 밤마다 네 방으로 달려가서 뭘 하는지 한동안 나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놈 소식을 딴 데서 궁금해하면 어쩌라고.”
정태의는 잠깐 생각을 멈추고 가자미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거 말투 한 번 야릇하다. 누가 들으면 밤마다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 바디랭귀지 실습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어,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그럼 뭐하는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요한에게, 정태의는 벌컥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밤마다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방에서 웃는 연습을 한다는 말은, 어쩐지 하기가 꺼려졌다.
우물우물 정태의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며 “그런 게 있어……, 그래도 그런 건 아니다…….” 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요한은 한심하다는 듯 정태의를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네가 그러니까 소문이 왕성하지…….”
차마 흘려들을 수 없는 그 말에 정태의가 “내가 뭐!” 하고 묻자, 요한은 끌끌 혀만 차면서 모른 체하다가 목덜미를 붙잡혀 짤짤 흔들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너랑 크리스토프랑 리하르트가 삼각관계라면서.”
“뭐?”
“금단의 관계에 눈을 떠서 요즘 부쩍 사이가 좋아진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 거기에 감초처럼 끼어든 너.”
“그게 뭐야!”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지만, 요한은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의 중요 구절에 줄을 그어 가면서, 입으로는 쯧쯧
혀를 차며 ‘사람이 아랫도리를 가볍게 놀리면 못쓴다.’라고 똥 묻은 개의 충고를 한다.
정태의는 아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소문의 앞부분이라면 정태의도 이미 들은 바 있었다정태의가 두통을 호소하는 주요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요전에 크리스토프가 매우 심각하게 ‘리하르트와 비역을 하고 말았다’고 정태의에게 호소하던 말이 어느새 새어나갔는지―소문의 근원지는 금방 찾을 수 있겠다―, 농담 반 진담
반처럼 퍼진 그 소문을 지금은 서익에서 당사자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크리스토프야 자기 입으로 낸 소문이니―소문을 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그저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만을 호소한 것뿐이었지만―그렇다 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대하는 리하르트를 볼 때마다 정태의는 가슴속이 따끔거렸다. 특히나 사람들 앞이랍시고 크리스토프에게마저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 다정한 듯이 대할 때는
더했다.
그러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헛소문은 신빙성을 갖고 널리 퍼져 간단 말야…….
그러나 그런 말은 차마 리하르트 본인에게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소문을 안타까워하며 골을 썩이고 있는 정태의였는데.
갑자기 요한이 그 위에 폭탄을 투하했다.
“내 결백을 위해 말해 두는데, 나는 절대로 그들이랑 어떠한 말 못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추호도! 없다.”
당사자만 모르고 주위사람들은 다 아는 소문이란 게 이래서 무섭구나, 정태의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며 요한에게 엄숙하게 변명했다.
그 말을 믿는지 마는지,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너, 크리스토프를 따라 리하르트의 바Bar에 들이닥쳤을 때, 릭이랑 얼씨구절씨구 했다면서.”
헉, 그 소문까지 돌았냐…….
그건 헛소문이 아니라서 뭐라고 변명할 말도 없다.
요한은 정태의의 표정에서 진실을 짚어냈는지, 이 난잡한……하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책으로 정태의와 자신의 시선을 끊었다.
“야, 아니라니까!!”
“뭐가? 릭한테 뚫렸다는 증언이 여러 입에서 나오던데, 아니야?”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그, ……, 크리스토프랑은 순결하고 결백한 교분을 유지하고 있단 말이다, 나는!”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하긴 나도 처음부터 네가 크리스토프랑 그럴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면상부터가 어울리는 면상이어야 말이지. 네 얼굴에 그런 수천 굴덴짜리
튤립이 가당키나 하냐.”
“얼굴로 사람 차별을―아니, 그게 아니라, 헛소문인 걸 알았으면 정정을 해 줘야 할 것 아냐!”
“내가 왜? 근거도 없이 정정해 봐야 믿을 놈들도 아니고, 뭐 소문이란 게 석 달도 채 안 가서 흐지부지해지는 법이잖아.”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요한에게 순간적인 살인 충동을 느끼는 정태의였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 카우치에 거의 눕다시피 기댄 채 책으로 얼굴을 덮어 버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요한이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릭이랑 얼씨구절씨구……. 병원에 안 실려간 게 용하다. 생각보다 몸이 튼튼한가 봐.”
아니면 나는 안 해 봐서 모르지만, 인체구조란 게 신비하게 생겨먹었으니까 의외로 그 정도 굵기는 쉽게 들어가는가 보지? ―하고 태평하게 혼잣말을 하며 피식피식 웃는
요한에게, 조용히 일어난 정태의는 근처의 쓰레기통 옆에 세워져 있던 1.6리터 맥주 페트병을 거꾸로 쥐고 스산하게 다가섰다.
“어디 네 몸으로 한 번 실험해 봐. 내가 도와줄게.”
응? 하고 정태의를 돌아보던 요한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페트병을 보곤 삽시에 낯빛을 굳혔다.
“야……, 설마 그 크기라는 건 아니지?”
“어, 심리적인 압박감은 비슷해. 육체적인 압박감도 뭐, 한계를 넘어서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많이 차이는 안 날 거다. 자아, 이리 와 봐.”
정태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인격 상실, 그 순간 요한의 뇌리를 스친 것은 그 말이었다.
“야, 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왜 나한테 다가오냐? 어이, 오지 마. 너 지금 꼭 전기톱을 든 제이슨 같은 거 알아?”
“잔말 말고 바지나 벗어.”
“시, 싫, 야, 하지, ……끄, 끼야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벗어! 벗으란 말이야!!”
서가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서 담소를 나누던 남자들이 그 난데없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왔을 때, 정태의는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요한의 벨트 버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소문이 싹을 틔웠다.
***
서익 끄트머리에 위치한 정태의의 방에서 본관 중앙현관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자세한 얼굴까지는 식별할 수 없을 만한 거리였다그러나 중앙현관 앞에 새카만 세단 두 대와 중형 왜건 몇 대가 뒤이어 멈춰 서고, 앞선 세단에서 딱 보기에도 귀빈인 듯한 남자 두 명이 내렸을 때, 차가 현관 앞에 설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정태의는 적어도 그들이 예전에 자신이 마주쳤던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남자, 세링게 별저의 주인이었던 그 남자라면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도 이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 남자는 존재감이
남달랐었다.
“뭐……, 다른 사람이라니 일단은 좀 마음이 놓이는걸.”
정태의는 가슴께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집을 그렇게 판판이 부숴 놓고 나왔는데, 그 주인을 다시 마주쳐서야 매우 멋쩍은 일이다. 당장 고개 숙여 ‘집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을 안내하듯이 나란히 서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그들은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도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의 모습을 보고, 정태의는
창가에서 물러섰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가고, 불그스름한 보랏빛 노을만 약간 그 기색이 남아 있었다. 곧 저녁 시간이다.
어쨌든 귀빈이 오셨으니 저들은 오늘 본관이나 동익에서 식사를 하겠구나. 그러면 서익의 식당은 좀 분위기가 한산하겠군.
오랜만에 느슨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방에서 나섰다.
오늘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뒹굴면서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다가 기분 좋게 잠들어야겠다, 그렇게 즐거운 오늘밤을 꿈꾸며 정태의는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며칠이나 전부터 소문으로 떠돌던 그 귀빈이 드디어 왔으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다들 그쪽으로 분주할 테니까 아무도 자신을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태의는 동익 1층 안쪽의 널찍하고 안락한 응접실에 앉아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야만 했다.
“…….”
“왜 그러시나요, 얼굴빛이 안 좋은데. 어딘가 안 좋으신가요?”
친절하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은, 결코 정태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리하르트였다.
관계를 따지자면 이 가운데 가장 정태의에게 세심한 신경을 쏟아야 하는 일레이는 정태의의 낯빛이 잿빛이건 말건 아랑곳 않는 눈치였고, 정태의에게 무뚝뚝하게나마 고백을 한
바 있는 크리스토프는 냉랭한 얼굴로 리하르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건너편 상석에는 낯선 아랍 남자가 둘.
토베에 구트라를 걸친 차림이 이 자리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들 특유의 존재감 덕분에 어색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나흘간 머무르고 돌아갈 예정이라는 그들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곧 어르신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을 뵌 뒤, 곧 간소하게 준비된 차를 마시며 저녁 느지막하게 예정된
만찬을 즐길 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만찬이 준비되기 전까지, 며칠간 이 집에서 그들을 대접하게 될 사람이자 마지막 협상의 상대자, 리하르트와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어째서 자신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정태의는 차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어떤 기준의 인선인지도 알 수 없다.
오늘 방문한 중동의 손님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이 눈앞의 두 남자와 리하르트, 그리고 그와 더불어 크리스토프가 앉아 있는 건 이해하겠다. 한 발 양보해서, 승계 후보를
지켜보며 평가한다는 입장인 일레이가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째서 자신이 끌려온 건지는, 차를 마시는 내도록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어딘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리하르트의 말을 거든 사람은 아랍에서 온 두 남자 가운데서도 더 윗자리로 보이는 오른쪽 남자였다.
선이 뚜렷하고 굵직해서 겉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서글서글하게 웃는 눈매 탓에 그 강렬함이 많이 흐려졌다.
“아……여유롭게 식사를 맛있게 하던 중에 끌려나오고 보니 소화가 잘 안 되나 보네요…….”
정태의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런. 부족하나마 정성껏 저녁 자리를 준비하는 중인데 곤란한 일이군요. 소화제라도 준비해 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걱정스러운 듯이 제안하는 리하르트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정태의는 줄곧 시선을 느꼈다.
건너편, 그 아랍 남자가 조용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직선적으로, 그는 정태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모른 체하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그러면 필경 나만 찝찝하겠지정태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태의를 살피던 그와 당연한 듯이 눈이 마주쳤다.
“이런 자리에 아무리 봐도 제삼자로 보이는 사람이 끼어 있으니 의아하신 것 같군요. 사실은 저도 의아합니다.”
정태의는 가볍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자 그 아랍인은 약간 눈을 크게 뜨더니 그 다음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거 실례했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았나 봅니다. 저는 말리크 알 카힘이라고 합니다.”
선뜻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정태의는 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고 말을 흐린다.
어디까지 소개를 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름이라면 어느 이름을 대야 하는지, 과연 대대적으로 지명수배가 된 정태의를 이 남자가 알 것인지 모를 것인지. 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정태의가 먼저 입을 열 수도 없다.
흘끔, 옆에 앉은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그들의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줄 뿐 정태의를 거들어 줄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말리크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정태의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 데에도 개의치 않는 듯, 기분 좋게 손을 놓으며 웃음 지었다.
그 순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정태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태의를 알고 있었다.
비록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는 하나 그는 이미 정태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왔음이 틀림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정태의의 얼굴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일레이의 얼굴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
정태의는 가만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일레이가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일레이는 눈가에만 웃음을 띤다. 이미 몇 년이나 살을 맞대고 살아오지 않았더라면 정태의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옅은 웃음을.
……젠장. 그런 자리구나.
타르텐과 교섭을 하기 전에 미리 봐 두기라도 하려는 건가. 그래 봐야 이미 고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어떠한 결정을 내릴 건지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짓고서 떠났을 텐데.
정태의는 ‘이래서 높은 자리에 앉으신 분들은 그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애꿎은 찻잔을 씹었다.
그들이 바랄 만한 것은, 아예 상관도 없이 동떨어진 조건으로 변제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범위를 좁혀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는 거라면, 리야드 폭격 주도범의 신병 양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일레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록 지금은 대단히 인간다워져서, 요 몇 년 동안은 사건사고 소식 없이 조용히 베를린에서만 머무르고 있는―간간이 일이 있다며 나가긴 하지만―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
시점에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
흘끔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 일레이가 짤막하게 물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아직도 모를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해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와인 병을 집어들어 별 관심 없이 살폈다. 옆에서 일레이가 픽 웃는 기척이 난다.
“그래, 나도 몇 년 동안 나 자신을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으니까.”
“음……?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인간이라곤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렇게 보였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몇 년 전까지.”
툭툭, 하얀 손이 정태의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얀 손을 덮은 진청색 장갑이.
아무래도 좋은데, 그대로 허벅지를 계속 문지르는 건 좀 그렇다……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는 정태의였다.
문득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바라보자 정태의의 허벅지 위에 머무르는 손을 크리스토프가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 한 번……, 속으로 혀를 차며 애꿎은 와인 병을 노려보던 그때였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말리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바에 따르면 두 분은 대단히 사이가 좋으시다지요. 과연, 듣던 대로군요.”
와인병의 라벨을 들여다보던 정태의는 문득 멈칫했다. 정태의의 허벅지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던 일레이의 손 역시 잠시 멈춘다.
정태의와 일레이 리그로우의 사이가 좋다.
그 사실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 말이 나온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말리크의 입이었다……아하. 과연.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지금 말리크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라고.
설마하니 김영수와 리그로우의 사이가 좋다는 괴소문을 들었을 리도 없는 말리크를 앞두고, 정태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대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낫다.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있던가요?”
정태의가 웃으며 묻자 말리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론이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 짙은 웃음을 보며, 정태의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나 보다. 이래서야 평생 장가가긴 글렀구나. 혼삿길 다 막혔다.
정태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미 퍼져 버린 소문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제발 앞으로는 적어도 저 요한 놈처럼 ‘그놈이랑 여차저차 하는데도 아랫도리가 멀쩡하단 말야?!’라고
대놓고 묻는 놈만 없기를 바랐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들이 테러범으로 수배가 된 것도, ‘그들의 사이가 좋아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때,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장갑을 낀 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고개를 든 정태의의 눈에는 눈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리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어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는 말리크를 그의 까만 눈이 똑바로 바라본다.
“말씀하시고 싶은 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출처에 대해서이신지?”
“하하, 설마요. 그저 좋은 교분을 유지하는 교우 관계가 참 좋아 보였을 뿐입니다.”
말리크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더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끝까지 방관자로 남아 그들 사이에 결코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정태의는, 갑자기 시선이 날아오자 저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입장이 입장인 탓인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한 국가의 수도를 테러한 바 있는 국제수배범.
그 국가의 국유회사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자격으로 온 사람.
수배범의 친우이며, 국유회사에는 빚을 지고 있는 중간자.
“정태의 씨였지요? 요전에는 제 상관이 신세를 졌다고 하시더군요.”
말리크의 말에 정태의는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다고 하나,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이 나오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뒤이어 나온 그 상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국유회사의 협상 대표격으로 왔을 이 남자의 상관이라면…….
정태의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말리크는 말을 이어 의문을 풀어준다.
“아니, 정확히는 형님 되시는 정재의 씨였던가요. 세링게의 별저에 모셨었는데, 편안히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이 남자의 상관이 누구인지 금세 깨달았다.
아마 몇십 년이 더 지나더라도 잊어버리기는 힘들 남자다.
“아―그―.”
그런데 풀네임이 기억나지 않아 잠시 더듬거리다가 번뜩 깨달았다. 그래, 그 상관이라는 남자의 별저도 바로 옆의 이 남자가 포탄을 퍼부어서 판판이 부숴 버렸었다.
정태의가 새로운 기억을 하나 더 떠올리고 어색하게 웃는 옆에서,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일레이가 말없이 웃었다.
말리크는 태연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 당시에는 설마 정태의 씨와 리그로우 씨가 그토록 교분이 깊을 줄은 모르셨었지요, 제 상관께서도.”
별저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그곳이 폭격을 맞을 줄,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뼈있는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일레이였다.
“깊은 교분이라……. 그 교분이라는 게 과연 어느 정도로 깊은지 궁금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드문 호인 같다.
보기 드문 호인 같은 일레이, 그 수식이 주는 위화감에 정태의가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것과 같은 때, 허벅지 위를 감돌던 일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한다면 허리 아래가 어디까지 맞아들어가는지도 보여 드리지요. 다만 관람료가 필요하겠지만.관람료가 필요하겠다고, 그 말을 덧붙이는 것과 동시였다.
정태의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을 때, 이미 일레이는 권총을 들어 안전장치를 풀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미처 말리거나 피하기도 전에.
퍼억―!
찻주전자가 조각조각 깨어지는 소리. 산산이 흩어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잎들이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던 큼직한 도자기 주전자가 흔적도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지고 그 손잡이며 밑받침만 남았다.
일레이가 총을 꺼내는 순간부터 얼어붙은 듯이 굳어 움직이지 않던 말리크는, 이윽고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자신들의 앞에 놓여 있던 세밀한 세공품의 파편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그 자리에 그 파편 대신 자신들의 피와 살이 흩어졌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임을 깨달았다.
눈앞에 앉은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그는 모르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타르텐을 방문하고 있는 리그로우의 인간’이라는 꺼풀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나, 그는 미치광이 릭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일국의 수도를 폭격하는.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요.”
말리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씁쓸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의 씁쓸한 심경을 만분의 일이나마 대변해 준 사람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크리스토프였다.
찻잔을 입을 가져가고 있던 그는 문득 인상을 찡그리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사납게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조각이 튀어서 차를 못 마시게 되어 버렸잖아.”
“그것 미안하게 됐군. 괜찮다면 내 걸 대신 마시도록 해. 마시던 거지만.”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그의 잔을 노려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물론 손을 뻗을 생각도 않았다.
역시 이 사람들은 핀트가 어긋나 있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귀빈으로 집에 모신 이 상황에서, 총탄이 허공을 날아다니는데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 인간들의 머릿속 구조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가만히 누르는 정태의의 옆에서, 그들 가운데 가장 건실한 리하르트만이 난처한 얼굴로 말리크에게 의례적인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리하르트의 진심 어린―듯 보이는―사과와, 그에 대한 말리크의 너그러운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일레이의 손에서 총을 슬쩍 빼앗아 깔고 앉아 버린 정태의는, 그럭저럭 이 자리를
수습한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파편이 튀었는지, 리하르트의 눈 아래에 조그만 상처가 생겨 있었다.
“어……, 조각이 튀었나 보네요. 다른 데는 괜찮으세요?”
정태의가 묻자,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러자 그는 도리어 그렇게 굳이 말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리하르트는 눈 아래에 빨간 실선처럼 새겨진 핏기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의 말마따나 그리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죄도 없이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셈인데도, 이 선량한 청년은 매우 우호적인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보기까지 하면서 말을
잇는다.
“타르텐과 리그로우는 오래도록 사이가 좋으니까요. 저 두 사람의 관계 못지않게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지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하고 덧붙이는 리하르트에게 말리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미묘한 말투에 정태의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차를 삼켰다.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끼는 것도 아니었는데. 끌고 온다 해도 저항했더라면 좋았을 걸.
아까부터 줄곧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각자의 입장을 담은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말들이 도무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속뜻이 감추어져 있는 말의 향연이라니, 이렇게
지치는 일도 드물다.
“그렇군요. 하긴 제가 들었던 것들이 모두 맞는 말이라고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말리크는 상황을 얼버무리려 함인지 무난하게 말을 꺼내었다.
“타르텐의 두 분도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원만해 보이시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곳에 오기 전에는 두 분의 사이가 제법 험악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도리어 두 분이 보통 이상으로 친밀하다는 말이 또 들려와서……아, 실례했습니다.”
말리크는 말을 하다 말고 유유히 웃으며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애초에 실례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까지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거다. 틀림없이 그들을 야유하는 빛도 언뜻 들어 있는 그 말뜻을, 정태의는 이내 알아들었다. 당장 스산하게
눈빛을 바꾸는 크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일레이도 알아들은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픽 웃는다.
유일하게 의아한 기색을 띠는 리하르트만이 그 문제의 소문을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가 비역을 하는 관계다―라는 소문이 시작된 근원인, 심지어 그 본인은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흘끔 쳐다보고서 정태의는 말없이
찻잔만 노려보았다크리스토프의 저 잘못된 상식부터 좀 고쳐 줘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하고 고민하는 정태의의 속내도 모른 채, 리하르트는 곧 의아한 기색을 웃는 낯으로 돌렸다.
“저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잘못된 소문이 그곳까지 갔던가요? 하하, 분명히 집안 사정상 경쟁관계에 있었던 적이 있긴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타르텐에는 어떠한 불화도 없습니다.
보시는 바대로, 크리스토프와 저는 매우 친밀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고요.”
동의라도 구하는 듯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보내는 리하르트의 얼굴만 보자면 정말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이상인 것 같았다. 원래 인상이 몹시 좋기도 한 사람이니
그런 느낌이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된다.
아냐, 지금 이 타이밍에서 그 눈웃음은 몹시 안 좋아, 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그 모종의 위험한 소문이 진실이라고 역설하는 셈이라고, 정태의는 괴롭게 속으로 외쳤지만 차마
그 말을 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다.
바보 크리스토프와는 달리 자신이 잠깐 그의 성기를 건드렸다는 것쯤은 결코 비역으로 치지도 않을 테고 또한 그런 건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리하르트가 그 소문을 듣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데, 한편 머릿속으로 자신의 피해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자신을 향해 웃는 걸 보고 움찔 입을
다물었다.
강간범이 경찰 앞에서 ‘강간이라니요. 우리는 원래 연인 관계인데 약간 뜻이 달랐을 뿐이에요. 그렇지?’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걸 보는 듯한 눈이다.
말없이 찻잔만 노려보고 있다가 리하르트에게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힘들면 부축해서 바래다주지.’라는 사뭇 걱정스런
목소리까지 들어 버린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면서 쓴 침을 삼켰다.
원래 리하르트는 만인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긴 했지만, 지금 크리스토프에게는 그 정도가 한층 더했다. 그의 말마따나 매우 친밀한 파트너십을 과장하기 위함인지도 몰랐지만,
아마 그보다는 정태의가 짐작하기엔 크리스토프가 진저리치는 저 반응을 보고 즐기기 위함이 틀림없어 보였다.
“거참,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신기하단 말야. 크리스토프가 저렇게 순순히 이런 상황을 견뎌 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불쑥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설마 개미 기어가는 그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닐 텐데 일레이가 엷게 휘어진 시선을 주었다.
그때였다.
리하르트의 그 다정함이 자신의 고통을 즐기기 위함이란 걸 뻔히 알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견디고만 있기에는 그 성질머리로 더 이상은 감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표정 없는 얼굴로 지그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마주보았다. 그래봐야 별 도리가 없는 그의 반응을 기대라도
하듯이.
잠시 그 무뚝뚝한 얼굴로 잡아먹을 듯 리하르트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 어느 순간 갑자기 결심한 듯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
크리스토프를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살피고 있던 정태의는 순간 차를 쿨럭 토할 뻔했다.
크리스토프는 웃고 있었다. 요 얼마간 밤마다 정태의를 붙들고 무던히도 연습했던 대로.
여전히 그 웃음은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웃음이 아니었고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는 느낌이 여실했지만,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웃고 있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까 꼭 초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럭저럭 합격, 하고 도장을 찍어 줄 수 있을 만한 웃음이었지만, 저 웃음이 리하르트를 향하고 있다는 게 심상찮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리하르트는.
대조적으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서 표정 자체가 아예 사라져 있었다. 아니, 보기에 따라서는 화난 것처럼 볼 수도 있을 만큼 삭막한 무표정이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의 눈매며 입가에 못 박혔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그제야 리하르트는 얼굴에서 무표정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평소와 같은 웃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을 뿐이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좀 더 그럴 듯한 웃음이다. 눈초리까지 살짝 휘어졌다.
“너, 다쳤잖아. 그대로 두면 덧날지도 몰라. 잠시 기다려, 약 갖다줄 테니까.”
“응? 아니, 그럴 것까지는…….”
그러나 리하르트가 사양을 하기도 전에 크리스토프는 일어서 자리를 떴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실내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웃음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라도 잠긴 듯,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입가와 턱을 감싸쥐듯이 덮는다.
그 부자연스러운 정적을 깬 것은, 말없이 자리를 지켜보던 말리크였다. 감탄한 목소리가 낮게 터져나온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대단히, 음, 잘생긴 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이제 보니 정말로 우아하시고, 또 화려한 분이시군요. 하하, 도무지 기동대처럼 거친 곳에 계셨다고는 상상도
못하겠는걸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그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렴. 과연 저 남자를 처음 보고서 그런 흉험한 세계를 상상하는 비뚤어진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나저나, 왜 그렇게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짓나 했더니 이 자리를 무난하게 떠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굳이 그를 찾으러 가서 다시 끌어다가 이 자리에 앉히고 계속 이야기를 진행할 만큼 중요한 화제도 딱히 없어 뵈고, 그럴 만한 사람도 없다.
“도저히 저분의 손에 무기가 들려 있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데……여기 계신 분들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말리크는 여전히 감탄한 빛을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 저택 안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거다.
그에게 대답한 사람은, 그제야 다시 웃음을 되찾은 리하르트였다. 푸근한 웃음을 눈가에 띠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저래 봬도 아주 훌륭한 전사이기도 하지요, 크리스토프는. T&R의 기동대에서도 수위를 다투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일레이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고 보니 제 상관과 절친하신 귀한 분께서 사설 경호대에 지도자급으로 맞아들일 적당한 인재를 찾고 계시던데, 나중에 저분의 솜씨를 꼭 한 번 뵙고 싶군요.”
말리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문득 일레이가 웃는 듯 마는 듯 입을 연다.
“라만과 절친한 귀한 분 가운데 사설 경호대를 두고 있을 만한 자라. ……타르텐에서 사람을 데려가 돈독한 관계를 쌓을 만도 하겠군.”
말투는 혼잣말이었으나 그 목소리를 못 들을 만큼 귀가 어두운 사람은 없었다.
……아. 또다. 말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말.
정태의는 공기 속에 짧게나마 미묘한 흐름이 스치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미묘한 흐름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인 말리크는, 잠시 침묵하다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모시는 분들은, 차관의 변제가 끝난 뒤에도 타르텐과 긴밀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더없이 절친하고 긴밀한 관계를 말이지요.”
느릿하게 꼬리를 끌며 말을 마친 말리크는 짙은 웃음을 띠었다.
얼마간 그곳에는 침묵이 흘렀다.
제각각의 상념이 흐르는 그 침묵 속에서, 정태의는 문득 아아, 하고 생각했다.
타르텐과 ‘더없이 절친하고 긴밀한’ 관계. 즉, 150년의 세월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한.
말리크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국유회사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권력이 있다. 일개 회사와는 비할 바가 안 되는.
150년의 교분이 이어진 곳과, 부와 권력의 집산처. 이중 택일을 해야 한다면.
정태의는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선택지를 눈앞에 들이민 이 상황이 다소 희극적이다.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곧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를 그 귀한 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하시는 겁니까? 과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나,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과연, 그는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끌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난하게 말을 돌려 버린다.
이내 눈치를 챈 말리크 역시 순순히 그의 화제를 따라가며 웃었다. 짐짓 친근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눈짓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그러나 오해는 말아 주시길. 아무런 동의도 없이 대뜸 아름다운 연인 분을 빼앗아 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헉.
정태의는 숨을 들이켰다.
하마터면 잘 마신 찻물을 토해 낼 뻔했다.
“…….”
정태의는 공연히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당혹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건 완전히 직구다. 직격탄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푸근하게 웃고 있는 말리크의 앞에서, 찻잔을 매만지던 손을 멈칫한 리하르트는 이상한 얼굴로 말리크를 보았다.
이해를 잘 하지 못하겠다는 눈치로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했지만, 몇 초쯤 지나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실례지만 지금 하신 말씀이……?“예? 아아.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신 크리스토프 타르텐 씨 말입니다. 설령 그분의 솜씨가 아무리 탐난다 한들, 설마 동의도 없이 강제로 모셔갈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말리크는 사태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에 잠긴 리하르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태의에게로 향했다. 굳이 정태의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단순히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더라면 좋았을 걸, 공연히 진땀이 흘러 정태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름다운 연인이라고 하셨는지요?”
리하르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여전히 눈가에 배어 있는 웃음이 상냥하다.
말리크는 그 반문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아, 하고 그는 감탄스럽게 고개를 내젓는다.
“아름답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달리 찾아보기가 힘들지요. 게다가 외모만 뛰어난 게 아니라니, 저런 분이 연인이라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지요. ……타인의 연인을
칭찬하는 것이 이쪽 문화권에서는 무례가 아니겠지요? 저는 그저 순수한 의미로 감탄한 것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리하르트의 표정에, 웃는 가운데서도 기묘한 빛이 감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깨달은 말리크는 도중에 예의바르게 몸가짐을 삼가며 정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잘못
짚은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다시 정태의에게 날아왔다. 정태의는 다시금 공연히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왜 나만 보냐. ……하긴 일레이는 철벽의 포커페이스를 자랑하니 그놈을 뚫어져라 봐 봤자 소용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지.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려 했지만,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정태의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가 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다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저와 크리스토프는 사촌입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긴 하나, 설마 그럴 리가요. 저는 연인도 있습니다. 물론 여성이지요.”
저 남자도 연인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고, 정태의는 며칠 전에 그 바에서 우연찮게 보았던 리하르트의 성행위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연인이라기보다는 거의 가학―피학적 주종관계던데, 이 상변태 같으니.
말리크는 그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눈을 껌벅이며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다가 이내 띄엄띄엄 말을 꺼낸다.
“아……, 아니었습니까? 이런, 그렇다면 대단히 큰 실례를 했군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말리크가 난처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리하르트와 입장이 바뀐다.
정태의는 모쪼록 리하르트가 조용히 넘어가기를―혹은 그 소문에 대해 캐어낸다 해도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기를―기원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정태의는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말리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놀라고 말았다. 단순히 그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런 걸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사소하다면 사소한 소문이었다. 어디까지 그 은밀한 소문이 퍼져 있는지 몰라도, 최소한 타르텐의 저택 바깥까지 벗어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 이야기까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렇게 겉보기만큼 그저 사람 좋게 잘 웃는 사내이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하긴 마지막 협상을 위해 찾아온 사람이 호락호락한 사람일 리가 없다.
정태의는 흠, 하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아군이기보다는 적일 확률이 높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나저나 여기 공기가 몹시 안 좋다.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한 듯하면서도 등줄기가 따끔따끔한 것이, 꽉 막힌 공간에서 사람들이 들어앉아 이산화탄소만 내뿜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태의가 이 따끔따끔한 자리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나기도 할 겸, 창문이라도 열기 위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이 자리에서 벗어났을 줄로만 생각했던 크리스토프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크리…….”
그러나 정태의가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가 다시 웃었다.
퍽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정말로 즐겁고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눈매가 어린애같이 반짝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웃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리하르트를 향하고 있었다.
잠깐, 바로 조금 전에 리하르트의 귀에 그 흉흉한 소문이 들어간 데다, 그가 그 소문을 부정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리하르트에게로 다가서서야, 의심은 깊어지기만 할 뿐이다.
정태의는 어떻게든 크리스토프를 가로막고 싶었지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보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곁에 이르렀다.
“리하르트, 내가 약 발라 줄게. 눈가에 흉이라도 남으면 안 좋잖아. 마침 좋은 약이 있어서 가져왔어. 내가 직접 발라 주지. 직접 내 손으로.”
정태의마저 놀란 그 천진하고 해맑은 웃음을 보고 다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가 선뜻 옆으로 다가와 눈가의 조그만
상처를 살피자 당혹스러운 듯 그대로 있었다뭔가 할 말이 몹시 많은 눈치였지만, 크리스토프가 진지하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살피자 입을 다물고 만다. 지금 말을 꺼내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이 자리의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알 바가 아닌 그는, 아슬아슬하게 리하르트의 눈을 비껴간 상처의 위치를 확인하곤 꽃처럼 웃으며 약통을 열었다.
“많이 아프겠다. 잠시만 기다려. 이 약이 썩 효과가 좋더라고.”
심지어는 짐짓 안쓰럽다는 말투로 걱정까지 해 주면서, 크리스토프는 손끝에 연고를 담뿍 묻혔다.
그 순간, 정태의가 앉아 있는 곳까지 알싸하게 풍겨온 낯익은 냄새.
“……!”
정태의가 황급히 크리스토프를 말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한 발 늦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딘지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가에 정성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었다. 호랑이 연고를.
그리고,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미심쩍은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낯빛이 변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지 않아서였다.
***
“고작 몇십 분 동안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아…….”
정태의는 침대에 푹 퍼져 엎드린 채 앓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위에서 머리 굴리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 할 게 못된다. 아래에서 몸으로 때우는 놈들은 이야기를 하기가 편했다. 저렇게 말속에 숨어 있는 뜻까지 생각하고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정치적인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
“도대체 나를 저 자리에 왜 끌고 간 거야.”
정태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로 옆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테이블을 끌어당겨 놓고 뭔가를 만지고 있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큼직한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을 건드리고 있던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원했거든.”
“저들이 정태의라는 인간을 보고 싶다고 말하기라도 했단 거냐, 설마…….”
“정확히는 ‘그러고 보니 정재이 씨의 동생분이 여기에 머무르신다지요.’라고 했었지.”
“……. 숨길 생각도 없고 숨길 수도 없었겠지만,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거네.”
정태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엎드리고 있던 몸을 약간 틀어 모로 누웠다.
지금은 크리스토프에게 약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그 불편한 담소 자리가 파장나서 이렇게 돌아와 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 바늘방석 같은 자리에 앉아서 찻잔만 노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연고를 눈 바로 아래에 바르자마자, 잠시 침묵하던 리하르트는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림없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끈거렸을 텐데도,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볍게
덮은 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내었다.
그런 다음에 바로 뛰쳐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 즈음에서 자리를 접고 잠시 방으로 돌아가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다시 뵙자고, 그렇게 수습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리하르트가 응접실에서 나가자, 여느 때라면 ‘오늘의 의무는 여기서 끝’이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릴 크리스토프도 일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정태의가 어디 가냐고 묻자 ‘어, 구경.’이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얼른 나가 버린 걸 보니, 리하르트가 괴롭게 눈가를 훔치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도 참, 뭐랄까…….”
“스스로 미움을 사는 성격이지.”
말을 고르느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정태의의 뒤를 이어 일레이가 간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음,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왜.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일레이의 말에서 단순한 말 이상의 것을 느낀 정태의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예전에 일로 여러 번 크리스토프와 얽혔다고 했다. 굳이 동일한 일에서 얽히지 않았다 해도 같은 집단 내에 있었으니 그런 쪽으로 부딪히는 일도 제법
있었을 거다.
함께 일하면 의외로 잘 맞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이런 인간들이 어긋나면 한없이 어긋나는 법이기도 하다.
“하긴 둘이서 쫓고 쫓기고 치고 빠지는 일도 있었다며.”
“그랬었지.“따지고 보면 집안 관계도 그렇고, 어릴 때에 종종 같이 어울렸던 것도 그렇고, 친척 형제랑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죽어라 서로를 몰아갈 수 있나?”
말하고 나서야 정태의는 자신이 잘못 물어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친형에게도 총구를 들이댔다는 남자였다.
게다가 당장 지금의 현실에서, 실제로 친척 형제인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 역시 서로를 거의 평생의 원수처럼 대하지 않는가.
일레이 역시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듯, 정태의를 흘끔 돌아보기만 할 뿐 굳이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너는 정재이와 형제 싸움도 안 해 봤나 보지. 아주 사이좋은 형제였던 모양이야.”
“아니……이 동네처럼 격렬한 형제 싸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난…….”
정태의는 잘래잘래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빙글 몸을 돌려 바로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 천장을 쳐다본다.
“하지만 실제로 나와 형은 거의 싸우는 일이 없었지. 싸울 만한 일도 없었고, 나도 그렇지만 형은 특히나 호전성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거든. 승부욕도 없었고. 물욕도 없었고.
욕심이 없는 사람과는 싸우기도 힘들어.”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정태의는 정말로 정재의와 싸운 기억이 없었다. 딱히 둘이 어울려서 사이좋게 논 기억도 별로 없지만, 싸우거나 다툰 적도 없다.
“그렇게 사이좋은 형제인데 요 몇 년 거의 만나지도 못했으니 퍽이나 안타깝겠군.”
“음……, 그러고 보니 전화조차도 거의 한 적이 없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매년 생일 즈음해서 한 번쯤은 연락을 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통화를 한 일이 없었다. 딱히 불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상대 역시 그러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도 먼저 알려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연락이 끊기다시피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서로 그런 면에 있어서는 건조한 형제들이었다.
“정재이라……. UNHRDO에 들어간 뒤에도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그치질 않는다지.”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아마 자신보다도 이 남자가 더 형의 소식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하고 대수롭잖게 반문했다.
“그 가운데엔 꽤 위험한 놈들도 섞여 있더군. 연관되면 두고두고 귀찮아질 놈들도 그렇고, 연관이 안 되면 두고두고 물고 늘어질 놈들도 그렇고.”
천재도 별로 좋은 게 못 돼, 그런 놈들이 꼬여드니,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등 뒤에 누워, 정태의는 볼을 긁적였다.
‘그런 놈들이 꼬여드는 천재’라는 건 어릴 적에도 그랬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위험하다는 말도 별로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여태 정재의에 대해서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재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프랑크푸르트로 온다던데.”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가지 말라고 했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라고.
정재의가 온다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도 승계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면 안 되나?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정태의는 은근히 중얼거려 본다.
그러자 당장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타이밍이 안 좋아.”
“…….”
한쪽 귀에 뭔가 이어폰 같은 것을 꽂고 기기를 조작하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입을 다물자 흘끔 돌아보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꼭 가고 싶나?”
“가능하면 가고 싶긴 한데, 꼭까지는 아니야. 그저 타이밍이 안 좋다는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지.”
정재의의 독일 방문과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하나씩 줄을 이어 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런 거였군.
“자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갈 생각은 없어. 전화나 하기로 하고, 드레스덴에서 일을 마치면 어서 베를린으로 돌아가자.”
정태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자신만 위험해지는 거라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질 소지가 있다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 위험을 범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기는 하지만모처럼 숙부와 형을 같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리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흠, 하고 잠시 기기 위를 툭툭 두드리던 일레이가 다시 돌아보았다. 성가신 듯 미간에 주름이 두엇 새겨져 있었다.
“꼭 만나고 싶다면 기다려. 이번 일 끝나고 나서 베를린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정태의는 응? 하고 눈을 크게 뜨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럼 마친 뒤에 시간이 된대?”
그렇다면 정태의가 프랑크푸르트로 가지 않아도 정재의가 베를린에 들러 주면 된다.
보통 그런 일정은 빡빡하게 잡곤 해서, 포럼을 마치면 곧 떠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베를린까지 올 시간은 안 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럼 포럼 마치고 형이 베를린으로 오면 되겠―.”
“힘들겠지. 뉴욕행 비행기가 포럼 당일 밤으로 잡혀 있으니까.”
바로 그 다음날 본부에서 연구회의가 잡혀 있을걸,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을 듣고, 정태의는 반짝반짝 웃던 얼굴을 거둔다. 그리고 조금 어벙하게 눈을 껌벅이며 어, 하고
중얼거린다.
“그럼 베를린으로 데려다준다는 건……, 아, 다음 기회에?”
정태의는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할 수 없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얼굴은 치워.”
“어?”
“포럼 당일날 공항으로 가기 전에 가로채서 데리고 오면 되잖아.”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일레이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얼굴’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지옥문 앞에 선 것 같은 얼굴이
찾아들었지만.
수행원과 경호원이 한둘 따라붙을 행차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포럼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전에 사람 하나를―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급수의 인물을―빼온다면.
범상한 방법은 아닐 게 틀림없었다.
“테러 수배만 해도 이미 죄질이 나쁘고 몹시 무겁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혹시?”
정태의가 진지하게 묻자 일레이는 픽 웃고 말았다.
“아냐, 그냥 다음 기회에 보자. 전화나 하고 마는 편이 낫겠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정태의는 서둘러 일레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터무니없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기기의 스위치를 연이어 탁탁탁 올리는 일레이의 손가락을 그의 어깨너머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뭐하는 거야.”
일레이의 등 뒤에 앉아 있던 정태의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으며 그가 건드리고 있는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큼직하고 시커먼 철제 가방 안에는 복잡하게 얽힌 회로가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아래쪽의 계기반에는 조그맣게 표기되어 있는 주파수 대역. 심지어 그 숫자는 400을
넘어서고 있었다. 반대쪽 옆에 붙어 간간이 깜빡거리고 있는 건 햄용 수신기.
그리고 그 옆으로 뻗어나와 얇은 코드로 이어져 있는 이어폰이, 일레이의 한쪽 귀에 꽂혀 있었다.
무심하게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정태의의 표정이 차차 무겁고 어두워졌다.
“……. 이봐……, 어쩐지 내 눈에는 이거…….”
“아, 이제 조용히 있어 봐. 욕실에서 나왔으니.”
“누구야?! 어디를 엿듣고 있는 거냐고?!”
정태의가 화들짝 놀라 벌컥 소리쳤다.
원래 범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아니 이 남자와 연관된 일 가운데 범죄와 무관한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지만―이렇게 눈앞에서 생생하게
범죄의 현장과 그 기기를 보게 되자 감개가 새로웠다.
정태의가 퍼렇게 정색을 하고 외치건 말건, 일레이는 계기반의 버튼을 한 번, 두 번 누르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정태의는 가자미눈으로
일레이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무슨 말을 더 할까정태의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서 등지고 도로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였다.
일레이는 이어폰을 하나 더 꺼내어 잇더니 정태의의 귀에 꽂아 주었다.
“……?!”
“어차피 설치되어 있다는 건 이놈도 알고 있을걸. 서로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일도 종종 있는 법이지.”
“뭐야, 누군데.”
정태의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리곤, 범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크리스토프. 내 눈을 멀게 할 작정이었나?」
헉.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깨달은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오늘 온 그 손님 방에라도 설치해 뒀으려니 했었는데, 이건 예상 밖의 인물이다.
“아니 만날 같이 붙어 다니면서 도청기까지 설치해 둔 이유가 뭐야…….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섭섭해서?”
“아하, 그 농담 잘 기억해 두지, 정태이.”
“헉……, 아냐아냐, 농담이었어, 농담.”
정태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이 남자가 기억해 둔다고 하면 무섭다. 몇 년이 지나서 이제는 잊어먹었으려니 해도 언제 어느 순간 튀어나와 정태의의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었다.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로 보아, 그 불쾌한 목소리의 주인공 리하르트의 방에는 그와 크리스토프 두 사람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하르트가 눈물 펑펑 흘리는 꼴을 보겠다고 좋아라 뒤쫓아갔으니 크리스토프가 거기에 있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얼마 전까지 리하르트의 방은 흉흉한 곳이라며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크리스토프가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도 말야,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지 않아?”
정태의는 이어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레이는 쉽게 동의하기 힘든 듯 슬쩍 눈썹만 치켜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어폰에서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잘 웃더군.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더니, 몸이 유쾌하면 마음도 유쾌해진다는 건가?」
리하르트의 언짢은 목소리에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있자, 이게 어째 별로 좋은 소리가 아닌 것 같다……?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니, 누가. 누구 방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크리스토프의 반문에 리하르트의 대답이 이어진다.
「네가. 김영…―아, 아니었지, 정태이라는 그 남자의 방에.」
“…….”
일레이의 말없는 시선이 날아왔다.
그 순간 정태의는 거의 펄쩍 뛰어올라 단정하게 정좌를 하고 앉아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냐, 아냐아냐아냐, 너도 알잖아, 크리스가 내 방에 왜 왔는지! 그, 그렇지, 오늘 너도 그 성과를 봤잖아, 그 웃는 얼굴!”
정태의의 다급한 변명에도 아랑곳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는, 정태의의 표정이 흐물흐물 울 것처럼 일그러진 뒤에야 슬쩍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늦깎이 얼간이가 밤마다 너를 침대에 끌어들일 거라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아.”
“……!! 너 지금 나 갖고 논 거구나!”
“글쎄, 사타구니를 건드리며 찝적거리는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네게 그 정도의 학습능력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태이.”
일레이가 흘끗 시선을 던졌다. 정태의는 다시 입을 합죽 다물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땀마저 흘렀다.
갑자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가 떠오르면서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쾌감이라기보다는 거의 공포다. 수틀리면 가끔 그렇게 날 잡아서 사람을 피폐하게 초토화시킬 때가
있었다, 이 남자는.
정태의는 우울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려 버렸다.
“확실히 주파수를 잘 잡아야 잘 들린다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 설치했어?”
발소리나 작은 기척까지도 제법 세세하게 잘 잡아내는 훌륭한 성능이 감탄스럽다.
“여기에 정식으로 들어오기 전날.”
“……. 재주도 좋습니다, 그려…….”
정태의는 반쯤 질려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번뜩 눈을 부라린다.
“설마 내 방에도 하나쯤 숨겨져 있는 것 아냐?!그러자 잠시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 일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정태의는 덜컥 눈을 크게 뜨며 이봐, 이봐! 하고 외쳤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방으로 돌아가면 당장 탐지기부터 돌려 봐야겠다.
정태의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기 방에서 마이크를 숨겨 놓을 만한 데를 떠올려보고 있을 때였다.
「아직 마지막 협상이 남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조건 제시를 할지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크리스토프. ……그들이 저들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들’과 ‘저들’이 누구인지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일레이가 듣고자 했던 이야기라는 것도 곧 깨달았다.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저쪽도 알고 있을 거라고 했으니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을 테지만, 말 자체가 아닌 부분에서 사소한 단서를 짚어내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그들에게 이쪽의 소리가 들릴 리도 없는데, 정태의는 숨을 죽였다.
크리스토프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사우디 측에서, 정태의나 일레이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그렇다면 크리스토프는 어떻게 할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그 무뚝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잘 알 것 같았다.
그 침묵 끝에, 리하르트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네가 정태이라는 그자와 친하게 지내선 곤란하다는 거다. ……안됐군, 크리스토프. 네가 처음으로 접촉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인데.」
희미하게 잔인한 빛을 띤 목소리.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저렇게 한다는 건,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저 둘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거야?”
“어느 쪽일 것 같지?”
“둘 다.”
“잘 알고 있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그래도 요 며칠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일을 거든다고 하기에, 사이가 나쁘긴 해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나 보다 싶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같이 붙어 있어서 정이
싹틀 관계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 둘은 혹시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나?”
정태의가 별 기대도 없이 불쑥 묻자, 의외로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미 오래 전이지만 프로젝트를 한 번 같이 한 적이 있지. 크리스토프가 승계를 포기하고 나가기 전에, 후보자 교육의 일환으로.”
협업 능력을 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플레이가 안 되는 일이었어,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에,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랬어? 어떻게 됐어?”
“실패했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협력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판이 깨어진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훌륭한 예가 되었어.”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크리스토프는 그렇다 쳐도, 리하르트는 관계가 어떻든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낼 성격으로 봤는데 의외군.”
“아아, 맞아. 리하르트는 제대로 했는데, 그의 도움은 절대로 받지 않겠다면서 크리스토프가 판을 깨어 놨지.”
“……. 크리스토프…….”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은 정태의도 여럿 본 바 있지만, 저 남자만큼 확연하게 갈리는 인간은 없었다.
“리하르트가 아주 이를 갈았겠군.”
정태의가 푹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일레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두말할 나위 있을까, 하는 무언의 기색이 그 웃음에 담겼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사우디에서 이쪽의 신병을 요구한다면―그 주제는 분명, 도청이 꺼림칙한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만큼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불쑥 내뱉는 목소리가 곧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릭을 넘겨줘. 어차피 폭격을 한 당사자는 그놈이잖아.」
“…….”
그렇구나. 이놈은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에 골고루 적을 심어 두었구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대수롭지도 않은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타르텐으로서도 상황은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그쪽의 요구에 따라―아직 변제 요구가 확정이 되지는 않았다 하나―이쪽을 인도해야 한다면, 백수십 년을 이어져 왔던 집안간의 관계에 금이 간다.
그렇다고 변제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사실 타르텐으로서는, 그들에게 정태의를 넘겨주는 걸로 일이 끝난다면 그 편이 훨씬 좋았다. 교분의 의가 상하지도 않고 약조도 지킬 수 있고.
그러니 아마 리하르트는 그쪽을 바라고 있을 테지만, 크리스토프는 말했다. 그냥 릭을 넘겨주라고.
그가 어떤 얼굴로 그 말을 했을지도 훤하게 떠올라서,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웃고 말았다.
크리스토프의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방해라도 할 생각인가? 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유리 심장에 입김을 좀 불어 살짝 흐려 놓은 정도로, 보는 사람이 우스워질 정도로 넋이 빠져서. ……쓸데없이 들떠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너답게 살아. 어차피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넌 그런 건 할 줄 모르잖아.」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지, 크리스토프는 어떤 말로 저 말을 듣고 있는지.
―나는 어딘가 비어 있어.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근원적인 뭔가에서부터, 없는 거야. 비어서 채워지지 않아.
그 조용하게 흘러나오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머리를 짚으며, 어디가 비어 버린 걸까, 그렇게 고개를 기울이던 그가 떠올랐다.
「내가 태이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래.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해.」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문득 자신에게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일레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고개를 젓고 만다.
알고 있다. 자신이 손을 내밀 한도가 어디까지인지는.
「그래서, 방해라도 하겠다고?」
리하르트의 느릿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목소리는 곧 낮고 선뜩한 음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고 들겠다면, 방해를 못하게 만들어 주지.」
그 직후였다.
뭔가 무겁게 부딪히는 소리. 나뒹구는 소리. 요란하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일레이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흘끔 눈길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친다.
“또 싸우는가 보군.”
일레이는 심상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짤막한 욕설이나 고함소리, 묵직한 타격음 따위는 싸우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거 말리러 가야 하나.”
정태의가 인상을 쓰고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하하아,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것 멋지군.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너희들이 싸우는 것 같아서 말리러 왔다’, 이렇게 말하려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니 우연히 볼일이 있어서 들른 척하고 그냥……하고 중얼거리다 말았다. 너무 빤히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구, 하긴 이놈들이 싸우는 것도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문제는 한 번 치고받으면 거의 사단을 볼 각오를 한다는 점이었지만, 그래도 집 안에서 저러면 그나마 안심이다. 설마하니 경찰이 와야 할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을 테고, 긴급한
사고가 일어나도 대처하기가 편하다.
“아직 둘 다 몸도 성치 않으니 싸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겠지.”
그렇게 덧붙이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격투 소리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
소리만 들리니까 꼭 무슨 격투게임 청취라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가 머무는 방에 제대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몇 번 잔심부름으로 부려 먹히면서 들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안까지 들어와 편하게 침대를 차지하고 앉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동익에 머무르는 귀빈께 준비된 방이라곤 하지만 내가 머무르는 방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짐짓 마음 상한 척 투덜거리자 “그럼 너도 오늘부터 여기서 머무르도록 해.”라는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헉, 정태의는 당장 몸을 사렸다. 하마터면 또 무덤을 팔 뻔했다.
“아냐, 여기엔 이 집안 어른들이 많이 머무르시는데 괜히 심기 어지럽히면 안 좋지. 난 역시 서익이 좋겠어. 음.”
정태의가 냉큼 고개를 젓자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동익에 들어와 살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줄을 섰는데, 거 참 특이한 희망이로군.”
흠? 하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새삼스럽게 방을 둘러본다.
분명 이 방은 썩 훌륭했다. 동익의 다른 방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나, 갖추어진 물건들이며 내부 구조 따위가 아주 훌륭하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나 은근한 박력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그야 싫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집이라면 달리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줄을 서면서까지 들어와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정태의의 의문에는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타르텐의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타르텐의 직계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자만이 들어와 살 수 있으니까, 동익에는.”
혹은 나와 같이 귀빈의 자격으로 머무르든가,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그제야 납득한다. 예전에도 얼핏 들은 적이 있는 듯했다.
“동익에 머무른다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될 수 있다는 거로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셈이지. 실제로 이곳에 머물다 나가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곳에서 나간 뒤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례도 더러 있다더군. …….”
일레이는 잠시 사이를 둔 뒤에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뭔가 말을 이으려다 그만둔 것 같은데?”
정태의가 의아해져서 추궁했지만 일레이는 어깨만 살짝 들어보였을 뿐이다.
“왜. 아는 사람 가운데 실제로 여기에서 쫓겨나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뭐……, 일단은.”
일레이는 애매하게 말했다.
이 남자가 말을 흐리다니 드문 일이다. 정태의는 잠시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캐물어 봐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화제도 아니다.
게다가, 이어폰 속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도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욕설과 거친 숨소리 따위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나 부딪히는 소리는 이제 뜸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건드리지 마……!」
드디어 한바탕 치고받는 건 잠깐이나마 끝난 모양이다.
「전에 말했었지. 너는 접근전에는 치명적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마땅한 무기도 없어. 그래, 이제 어쩔 작정이지?」
육탄전으로 체력이 심하게 소진되었는지 리하르트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웃음이 담긴 그 소리는, 지금 그가 다소나마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 손대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휙 뽑아들고, 마치 그 이어폰이 그 목소리의 주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납게 노려본다.
“이놈들은 같이 있으면 싸우는 것밖에 안 하나? 설마 요즘 낮 동안 같이 다니면서도 늘 이 모양인 건 아니겠지?”
“최소한 타르텐의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지 않아.”
“……. 사적인 시간대에는 그런다는 소리네.정태의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한 손에 이어폰의 코드를 걸치고 빙글빙글 돌렸다. 손가락에 코드가 감긴다. 다 감은 다음에는 다시 풀기를 몇 번쯤 거듭하며, 천장을
쳐다본다.
“베를린에 있으면서 말야.”
문득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다. 일레이는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준다.
“몇 년이나 집에서 평화롭게 살았더니 적응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이대로는 몇 년 더 있으면 진짜로 다른 데서 살기 힘들어지는 거 아냐……?”
베를린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적응을 못하고 힘들어하게 되면 낭패다. 그때쯤이면 더 이상 적은 나이도 아닐 텐데.
그러나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일레이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깨닫곤 얼른 ‘아, 그래그래, 이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하고 중얼거리며 이어폰을
도로 꼈다. 뭔지 몰라도 또 뭔가 이놈의 마음에 안 드는 화제였던 모양이다.
「너는 비열하고 잔인해. 내가 아는 한, 앞으로도, 너만큼 냉혹한 인간은 없을, 거다.」
이어폰을 끼자마자 들려오는 소리는 거칠게 떨리는 크리스토프의 비난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서 대놓고 이렇게 매도하다니, 몰래 듣는 처지에 할 말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이 껄끄러워질 정도다.
정태의가 그럴 정도인데,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의 기분은 좋을 리가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리하르트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니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아니, 너 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만이 나를 그렇게 보지. ……나는 거울과 같아서, 나를 보는 사람의 기대대로
부응해 주지.」
문득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뭔가, 정확히 짚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마치 심장 위에서 스멀거리며 기어다니다가 비수처럼 박히는 것 같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 목소리는 무척 상냥하고 다정했는데도, 가슴 속이 서늘하다.
그 순간.
“넌 더 이상 듣지 마.”
갑자기 귀에서 이어폰이 뽑혀나갔다.
코드를 잡아당겨 정태의에게서 이어폰을 빼앗아 버린 일레이는, 그 이어폰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심장의 그 싸늘한 느낌이 가시고 나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사람이 듣고 있는데 갑자기.”
꼭 엿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렇게 빼앗기고 나니 그것도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게다가 저렇게 선뜩한 말을 듣고 나니 공연히 심장이 불안스레 묵직해졌다.
여전히 자신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일레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또 치고받는 것뿐일 텐데 더 들어서 뭐하게. 너는 그만 들어. 그보다,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 보지 그래.”
“뭘.”
“몇 년 뒤에 다른 데서 살 때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문득 일레이는 몸을 구부렸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있는 정태의의 위로 몸을 굽혀 상반신을 비스듬하게 겹친다.
“아니, 왜 또 갑자기―.”
그러나 정태의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그 입 속으로 낯익은 혀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태의의 숨통까지 막을 생각은 없는지 그 혀는 가볍게 정태의의 혀와 잇몸, 입술을 몇 번 쓰다듬다 떨어졌다.
“왜. 이제 슬슬 베를린이 지겨워졌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살아 보고 싶어?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봐.”
정태의는 그의 혀가 입술에서 떨어져서 귓불로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직도 이런 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끔 일레이는 그가 의식을 하는지 못하는지, 굉장히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일 때가 있었다.
마치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는 듯한 그 말이 어쩐지 멋쩍어서, 정태의는 조금 머쓱해지고 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잠깐 하던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귓불에서 뺨으로 돌아오는 그 입술의 감촉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그래, 이런 것도 문제다. 어쩌다가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익숙하게 느끼게 되었는지.
정말로 나중에 언젠가 베를린을 떠나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면, 인생이 아주 엄청난 변혁을 일으킬 것 같았다“아까 잠깐 하던 생각이라.”
“베를린에도 꽤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이제는 그곳이 내 집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그런데 거기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할까 싶었거든. 그래서 아주 잠깐 그 생각만 좀…….”
문득 뺨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잠시 멈추었다.
약간 고개를 든 일레이는 잠시 말없이 뭘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좀 이상하다는 빛 같기도 했다―정태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대수롭잖은 투로 말한다.
“왜. 내가 없는 동안, 형이 너더러 나가라고 하던가?”
“아니, 그보다는…….”
정태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끈기 있게 뒷말을 기다리며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가끔씩 시선이 비껴난다.
“시간이 지난 뒤에 말야, 너랑 어떤 이유로든 떨어지게 되면 계속 베를린에서 살기는 좀 그렇잖아. 그나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놈들과도 자주 만나긴 힘들
테고, 형은 UNHRDO에 있으니까 형이랑 같이 살기도 힘들겠고. 의외로 갈 곳이 없더라, 나.”
“……. 흐음……. 그래, 그래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몇 초쯤 사이를 두고 일레이가 사뭇 궁금한 듯 물었다. 어쩐지 귓불을 건드리는 입술도, 목소리도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 어린애를 꼬드겨서 중요한 비밀을 캐어내려는 악마의
목소리 같다는 사실을, 정태의는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글쎄……. 그렇게 되면 그냥 너랑은 상관없이 카일의 손님이라는 자격으로만 그 집에 머무르면, ……좀 그런가?”
늘상 손님이 끊이지 않고 넘쳐나는 집이긴 하지만, 장기 투숙 손님이라고 해 봐야 한두 달이 기껏이었다. 몇 년이고 그 집에 죽치며 사는 손님은 정태의 본인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손을 들어 정태의의 뺨을 엄지로 문지르기 시작하는 손길에, 그제야 정태의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뭔가 속이 비꼬이기라도 한 듯 뺨을 아플 정도로 꼬집어 정태의는 아야, 하고 부루퉁하게 눈살을 찡그렸다. 그러나 일레이는 몇 번쯤 더 뺨을 꼬집듯이 문질렀다.
이놈이 또 뭔가 속이 틀렸나 싶었지만, 생각에 잠긴 일레이의 표정에서는 별반 불쾌하거나 언짢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약간 고민스러운 일이라도 생긴 듯이 으음,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들겠는데…….”
“응?”
정태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대화의 맥락이 맞지 않다.
아니면 혹시, 카일의 손님으로 베를린의 저택에 머무르기는 힘들겠다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정태의의 짐작은, 뒤이어 나오는 말로 인해 멋지게 빗나갔다.
“한국에 있다는 네 친구들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데 정재이 말이지. 그놈은 없애 버리기 힘들 것 같단 말야. 머리에 대고 총을 쏴도 도리어 내가 다치게 되는 놈이니. 어떻게
한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조로 말하고 있지만, 이미 이 남자와 몇 년을 지냈다. 농담처럼 하는 이 말은 진담이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에 헛바람을 들이켜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말았다.
쿨럭쿨럭, 헛바람을 잘못 들이켠 탓에 폐가 끊어질 것 같았다.
일레이를 밀어내고 몸을 구부린 채 한참 기침을 하다가 겨우 그 기침이 잦아들자, 일레이는 다시 정태의를 내리누르고 그 위에 상반신을 겹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술을 겹치는 그를 다시 한 번 밀어내며, 정태의는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몰라도 까닥 잘못하면 친구와 가족이 한꺼번에 줄초상 치르게 생겼는데 지금 다른 게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왜왜왜왜 없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렸다. 그런 다음에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너랑 만난 적도 없는 내 친구들이랑, 너랑 만난 지 수백만 년은 된 우리 형이 네게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왜 없애.”
“왜냐니.일레이는 여전히 평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고 있는 정태의의 손을 잡아서 떨어뜨렸다.
“갈 곳을 없애야 애초에 그런 생각을 안 하지. 태이, 너는 종종 쓸데없는 생각을 지나치게 할 때가 있어.”
젠장, 뭘 밟았나 했더니 그거였구나.
정태의는 뺨을 느릿하게 핥아올리는 일레이에게 서둘러 말했다.
“아냐, 아냐! 절대 그런 생각 안 할게! 난 베를린에 내 뼈를 묻을 각오를 굳게 다지고 있었단 말이야!”
바로 1초 전부터, 라는 말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뺨을 살짝살짝 깨물며 핥아 대던 그가 문득 피식 웃는 기척이 났다.
이놈이 또 나를 갖고 놀았구나.
정태의는 푹, 몸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아주 갖고 놀아라, 갖고 놀아.”
“흠. 오해하지 않게 말해 두자면, 나는 농담이 아니야.”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는 일레이에게서, 약간 쑥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무작정 사람을 짓누르며 정신없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라면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는데―랄까 그럴 때에는 어차피 생각이란 걸 할 여유가 없어진다―, 가끔 무슨 변덕인지
이렇게 살짝살짝 건드리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거듭되어도 어딘지 좀 쑥스럽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정태의의 그런 기색을 즐기는 눈치인 이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종종 이러곤 했다.
정태의는 자신의 입술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입을 열어 주며,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쪽은 어때. 이제 싸움 좀 그쳤어?”
일레이가 한쪽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는 음? 하고 반문하더니 어딘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라고 혼잣말처럼 말하며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입술을 겹쳤다.
그 말을 듣고, 정태의는 이제야 저쪽 두 사람도 좀 진정국면에 들어섰나 보다, 하고 안심하면서 입 안으로 들어온 일레이의 혀를 툭툭 혀끝으로 건드렸다.
패션:다이아포닉 심포니아 3. 소문과 진실(2)
***
욕실에서 한참 동안 물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샤워기 아래에서 눈가에 물줄기를 맞으며, 리하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속을 억누르는 듯 불편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만이 그의 심경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욕실 문턱 위에 기대어 서서, 크리스토프는 무심한 척하는 얼굴로 은근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간이 리하르트가 그를 흘끔 노려볼 때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이윽고 리하르트는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그럭저럭 진정이 되었는지, 불그스름하게 실핏줄이 선 눈을 수건으로 닦으며 샤워부스에서 나온다.
“크리스토프. 내 눈을 멀게 할 작정이었나?”
조용히 말하는 목소리가 무뚝뚝하다. 억누른 울화가 뱃속까지 차오른 눈치였다.
“설마.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훨씬 간단한 방법을 이미 예전에 썼겠지.”
“그러나 눈가에 발라서는 안 되는 약이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내 방까지 구경하러 따라들어왔을 리가 없으니.”
리하르트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래서 뭐’라는 듯 턱을 당기며 리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았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고맙군. 덕분에 긁힌 곳의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아. 손수 발라 주는 그 다정함에 감격해서 아플 새도 없었지만.”
눈가를 손가락 마디로 문지르며 진지하게 비아냥거리는 리하르트를 보고, 크리스토프는 흥이 식은 듯 걸음을 돌렸다. 이제 볼 건 다 봤으니 이곳에는 더 있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설마하니 리하르트가 그 정도로 펑펑 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제대로 못 뜨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기대가 어긋났다.
이상을 느끼자마자 한쪽 눈을 손으로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리하르트는, 잠시 뒤 만찬에서 다시 뵙자고 하곤 그대로 자리를 떴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리하르트의 뒤를 쫓았다. 아마도 뒤에 남겨진 그들은 각자 주어진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쉬다가 만찬 자리에
올 터였다.
크리스토프가 막 그의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뒤에서 수건으로 천천히 몸의 물기를 닦으며 리하르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잘 웃더군.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더니, 몸이 유쾌하면 마음도 유쾌해진다는 건가?”
“뭐?”
크리스토프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니, 누가. 누구 방에.”
“네가. 김영…―아, 아니었지, 정태이라는 그 남자의 방에.”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크리스토프는 불쾌하게 말했다. 리하르트는 약간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 그런 말이 안 퍼질 것 같나? 왜. 동성간의 관계는 그렇게나 순수하다면서, 막상 그 남자와 그 짓을 해 보니까 그것도 아니다 싶나?”
“내가 그 녀석과?! 그런 일은 하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울컥해서 외쳤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남자에게 조롱거리로 던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리하르트는 그 말을 믿을 생각도 없었던 듯 코웃음 쳤다. 천천히, 그의 시선 위로 악의가 스며 나왔다.
“그래. 그럼 밤마다 그곳에서 뭘 한다는 거지? 동화책이라도 읽나, 응?”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결국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 말 안 해. 그걸 네놈에게 말할 이유는 없겠지.”
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쥔 손에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갔지만 곧 다시 손에서 힘을 뺐다.
“말할 이유라면 분명히 있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뜩하게 스치는 목소리가, 그가 분명히 화가 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라. 설마 네 아래에서 일하는 신세이니 사생활까지 낱낱이 다 까발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네 사생활 따위는 관심 없어. 네가 누구랑 어떻게 난잡하게 놀아나든 내 알 바도 아니다. ……아, 그래. 그 정신병을 가지고서 남들과 부대낄 수나마 있다면 말이겠지만.”
뒷말에 선명한 악의를 담아 말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네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내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은 반대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수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새로 수건을 한 장 꺼내어, 적당히 물기를 훑은 머리카락을 그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다시 닦기 시작했다. 사소한 부분에서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그 버릇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모든 일을 적당히 느슨하게 흘려보내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완벽주의에 가까웠다.
“네가 나더러 결벽증이라고 손가락질할 게 아니야.”
내팽개쳐진 수건을 내려다보며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지만, 리하르트는 그 말은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리크가 널 데려가고 싶은 눈치더군. 사설 경호대의 지도자급이라……. 제법 괜찮은 자리 아닌가?”
“사설 경호대? 그게 뭐야.”
갑작스런 말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옷장 쪽으로 걸어가던 리하르트는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차관 변제만이 아니란 소리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덮어두고.”
옷장 앞에 선 리하르트는 약간 젖어들기 시작한 수건으로 몸을 한 번 더 훔쳤다. 그러면서 확실히 짚어 둬야겠다는 듯 크리스토프에게로 돌아선다.
“아직 마지막 협상이 남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조건 제시를 할지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크리스토프.”
“…….”
“그들이 저들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정태이라는 그자와 친하게 지내선 곤란하다는 거다. ……안됐군, 크리스토프. 네가 처음으로 접촉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인데.”
싸늘한 비웃음이었다어쩌면 그는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대단히 통쾌하게 여기는지도 몰랐다.
저울 한가운데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은, 크리스토프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었다. 가족이나 동료를 떠나, 주위사람들이 알아차릴 만큼 확연하게 크리스토프가
호감을 표시한 사람은 정태의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조용히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말한다.
“릭을 넘겨줘. 어차피 폭격을 한 당사자는 그놈이잖아.”
그렇게 불현듯 말을 하고 나서야 그 말이 자신의 머릿속에 이해가 된 것처럼 잠시 굳어 있던 크리스토프는, 곧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저 사우디 놈들. 저놈들은 애초에 타르텐과 리그로우의 관계를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조건을 내걸었어. 그 조건을 이행해 리그로우를 잡아
그들에게 넘겨주든, 혹은 조건을 불이행하든, 어느 쪽이든 이쪽이 엿 먹는 건 마찬가지다.”
말을 하던 도중에 언짢아진 듯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말을 마쳤을 때, 리하르트는 옷장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비웃음조차도 사라져 있었다. 희미한 짜증과 분노 따위가 뒤섞여 그의 표정 위에 드러나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만일 그들의 제안이 다른 것이면. 즉 리그로우가와의 교분을 해치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조건, 예컨대 정재이의 동생이며 폭력에도 책임이 있는 자의
목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살짝 핏기가 가신 얼굴로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졌지만 그 사이로는 끝내 말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성가신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막 꺼내던 옷가지를 침대 위에 거칠게 내던져 버리곤 크리스토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상처가 흉하게 남아 있는 나신이 크리스토프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그 가운데에는 바로 얼마 전에 생겨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었다. 심하게 어긋났던 팔 관절은 다시 위치를 맞추었다곤 하나 보기에도 아플 정도로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방해라도 할 생각인가? 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유리 심장에 입김을 좀 불어 살짝 흐려 놓은 정도로, 보는 사람이 우스워질 정도로 넋이 빠져서.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주제넘게 이제 와서 사람 같은 척하지 말고.”
“…….”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뭔가 말한 듯했지만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이 새파랗게 질려 리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들떠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너답게 살아. 어차피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넌 그런 건 할 줄 모르잖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용서 없이 칼날 같은 말을 던진다.
“……그렇지, 않아.”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바람이 새어나오는 듯 가느다란 말소리에, 리하르트가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뭐?” 하고 되물었다.
“내가 태이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래.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해. 좋아한다고.”
한 마디 한 마디 띄엄띄엄,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듯이.
그 새하얀 얼굴을 앞두고, 리하르트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마네킹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리하르트의 입술만이 움직였다. 그 무표정을 그대로 담은 채 기계처럼 입술 사이로 무기질적인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래서.”
“…―.”
“방해라도 하겠다고? ……타르텐의 성을 가진 주제에, 그 자를 위해서 타르텐의 일을 방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크리스토프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화가 난 듯, 당혹스러운 듯, 불안하고 초조한 듯.
마치 뭐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가느다랗게 중얼거린다.
“나는, 그 녀석이, 좋, …….”
고장 난 녹음기처럼 말마디마다 끊기던 그 목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린 탓이다.
“닥쳐. ―잊어버린 건 아닐 테지, 크리스토프. 너는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따르겠다고 했어. 결코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 일은 하지 않고 내 일을 돕겠다고, 너는 약속했어.
잊어버렸나?”
“놔……!리하르트의 손이 멱살을 움켜쥐는 순간 움칫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그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험악하게 외쳤다. 그의 팔을 꺾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팔꿈치를
움켜쥐었지만, 옷 위라면 몰라도 벗은 팔의 살갗이 직접 손바닥에 닿자 그조차 꺼려지는 듯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팔꿈치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불쾌한 듯 움칫거리는 그 손가락을 리하르트는 흘끗 쳐다보았다. 문득 그는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래, 타르텐을 등지면서까지 방해하고 싶어질 만도 하겠지. 사람에게 닿는 건 물론, 건드리는 것조차 이렇게 싫어하는 네가 먼저 나서서 가까이 갈 정도로 마음에 드는 놈인데,
응? 설마 그런 인간이 네 인생에 나타날 줄은 꿈도 못 꿨을 텐데, 소중하겠지? 조금이라도 인간 같아진 기분이 들어서 좋겠지?”
“……. ……놔, 놓으라고!”
“잘 들어, 크리스토프. 너는 결코 나를 방해해선 안 돼. 내 말을 거슬러서도 안 되고. 그래도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고 들겠다면, 방해를 못하게 만들어 주지.”
리하르트는 나직이 말을 끝냄과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뱃속으로 주먹을 질러넣었다. 둔탁하고 억센 소리와 함께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약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 아픔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이내 험악한 얼굴로 돌아와 그의 팔꿈치를 위에서 후려갈겼다.
“놔, 놓으란 말이다! 나를 건드리지 마!”
짧으나 매서운 주먹에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크리스토프의 다리를 걷어찼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턱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을 리하르트가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가로막자, 붙잡힌 감각이 소름끼쳐 얼른 뿌리치고 만다. 무릎으로 그의 배를
찍었지만, 짧은 신음을 내뱉은 리하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리스토프의 무릎을 끌어안아 버린다.
“……!”
나신인 리하르트에게 무릎―정확히는 무릎 아래쪽의 다리를 끌어안긴 크리스토프는 진저리를 치며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단단히 끌어안은 그 굵은 팔은 도통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세게 부둥켜안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분명 고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크리스토프의 발목에 뜨끈한 체온이 닿았다.
“……!”
“……!! 놔!!”
리하르트 역시 예상치 못했던 듯 약간 낯을 찌푸렸다. 타인의 발 근처에 자신의 치부가 닿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발목에 닿은 체온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삽시에 핏기가 가셨다. 불쾌감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그를
떠밀었다.
리하르트는 혀를 차면서도 그의 다리를 놓지 않았고, 그 통에 크리스토프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두터운 러그 위로 둔한 소리와 함께 뒹군 크리스토프의 위로, 리하르트가 올라탄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불쾌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배 위에 올라앉은 리하르트를 뿌리치려 안간힘 썼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더라면 뿌리쳐내고 다시 일어서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크리스토프의 기술이나 습관 따위를 잘 알며, 또한 본인 역시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을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서 그가 날뛸 수 없도록 무게를 실으며, 그의 가슴과 목을 짚어 내리눌렀다.
둘 다, 분노와 흥분 탓에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리하르트 역시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며, 거칠게 내뱉는다.
“전에 말했었지. 너는 접근전에는 치명적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마땅한 무기도 없어. 그래, 이제 어쩔 작정이지?”
“비켜……! 손대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목줄기를 움켜쥔 손 아래, 그는 의도적으로 크리스토프의 가슴 위로 다른 손을 미끄러뜨렸다. 구깃하게 흐트러진 양복 아래, 얇은 실크 셔츠 바로 위로.
부르르 떨리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바로 전해졌다.
“놔, ……놔, 놔!!”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파란 눈동자는, 마치 그 안에서 시퍼렇게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는 그 역시 이성의 고삐가 반쯤 풀린 듯 잔혹하게 그 눈동자를 내려다본다.
“말해. 나를 방해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따르겠다고.”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바싹 붙어 내려왔다.
크리스토프는 이를 악물었다. 고함조차 삼키며 리하르트를 노려본다리하르트는 연이어 말했다.
“말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어쭙잖게 인간다운 척하지 말고, 아무도 좋아할 줄 모른다고.”
“…―.”
“인간적인 감정? 그런 게 네게 왜 필요하지? 넌 그저 날 싫어하기만 하면 돼. 그게, 네가 아는 유일한 감정이면 된다고. 증오만을 아는 인간이라니, 네게 딱 어울리지 않나?”
“……. 너는 타르텐을 이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르신의 뒤를 잇지는 못할 거다.”
크리스토프가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격렬한 분노와 혐오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비열하고 잔인해. 내가 아는 한, 앞으로도, 너만큼 냉혹한 인간은 없을, 거다.”
푸르스름한 입술마저 떨려, 말꼬리가 멈칫거렸다.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석상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가면을 쓴 듯한 얼굴이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가면은 이윽고 천천히, 천천히 웃었다. 리하르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웃음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설마하니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아니, 너 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만이 나를 그렇게 보지.”
리하르트의 눈매가 휘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무리 연습해도 지을 수 없었던 그 상냥한 눈매가,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입매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거울과 같아서, 나를 보는 사람의 기대대로 부응해 주지.”
조용하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는 푹신한 러그에 묻혀 둔탁하게 울렸다.
가끔은 바닥이 아닌 것을 두들기는 듯 보다 찰진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바닥을 연거푸 두드린다.
거의 반광란에 가까운 상태로 미친 듯이 날뛰며 버둥거리는 인간을 묶어 두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조건이 대등한 상태에 있다면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조건에서 열세에 있다면, 그리고 억압하는 쪽에서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과는 대개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하르트도, 크리스토프도, 처음부터 어느 쪽이 유리하고 어느 쪽이 불리한지 알고 있었다.
한 뼘 가량 차이나는 신장도, 두세 체급은 차이가 날 몸집도,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보다 체격 조건이 나았다.
체력 역시 마찬가지다. 순발력이나 속도에서는 우세하나 체력 자체는 크리스토프가 열세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최초의 자세에서 나는 차이.
아래에 깔려서 거의 몸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리하르트는, 불가피하게 크리스토프에게 얻어맞거나 관절이 가볍게 어긋나는 정도의 데미지를 감수하며 움직였다.
처음부터 크리스토프가 불리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처음부터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결코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육중한 마호가니 테이블 다리에 크리스토프의 한 팔을 묶어 두고 났을 때, 그들은 모두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크리스토프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필연적으로 얻어맞거나 찍히고 만 리하르트의 이마며 배, 가슴 따위에 불그스름한 자욱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하루만
지나면 시커멓게 멍이 들 자욱이다. 테이블에 부딪혀 살짝 찢어진 이마에서는 핏방울이 맺히다가 굳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크리스토프는 시퍼렇게 질려 독이 차오른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먼지 하나 없었던 옷가지는 잔뜩 구겨져 흐트러졌고, 그나마 양복 웃옷은 단추가 떨어져 반쯤 벗겨져 나갔다. 구두 역시 어디로 날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를 가볍게 덮을 만한 길이로 단정하게 사락거렸던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땀에 흥건하게 젖은 이마며 뺨에 너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크리스토프의 아랫배를 단단히 누르고 앉은 채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보는군, 크리스토프.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이 아니면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도 않았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세라도 넘어갈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시퍼렇게 리하르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떻게 할 거지? 지금 나는 네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고, 심장을 파낼 수도 있고, 산 채로 팔다리를 뜯어 버릴 수도 있어.”
리하르트가 느리게 말했다그 역시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비록 분노하거나 감정이 들떠도 다른 사람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훌륭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그였지만, 지금은 평연한 듯 낮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서도,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도, 희미하게 흥분해 일렁이는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었다. 어깨를 떨며 움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말해. 다시는 내 말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르겠다고, 네 입으로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하란 말이다.”
“…―.”
크리스토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라는 입에서 숨소리 하나라도 내보낼 것 같냐는 듯.
리하르트는 묵묵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정도는 시간의 유예를 주겠다는 듯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조용히 한숨을 쉬며 웃었다.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부드럽게, 사랑스런 어린애를 어르는 것처럼 속삭인다.
“너는 쓸데없이 고집이 세단 말야. 옛날부터 그랬어.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서 넘기는 요령이라곤 없이, 약한 소리는 죽어도 안 하고 견뎠거든.”
문득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위로 바싹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쇄골 바로 아래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면 이번엔 과연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안쓰러운 듯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였다.
넉넉하게 펼쳐 쇄골 위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얇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갗이 직접 맞닿기라도 한 듯 체온과 감각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셔츠 아래에서, 크리스토프는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만지지 마! 뭘 하는…―!”
반사적으로 벌컥 소리를 지르던 그의 창백한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가슴 위의 한 곳에서 리하르트의 손이 멎은 탓이다.
“흠……? 갑자기 조용해졌군. 목이 쉴 때까지 고함을 질러 댈 줄 알았는데. 아니면 의외로 여기는 만져 주니까 기분이 좋은 건가?”
뜻밖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셔츠 위로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낸 돌기 위에서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 손톱으로 가볍게 긁을 때마다 흠칫, 흠칫, 몸을 움츠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마…….”
떨리는 목소리가 닫힌 목을 비집고 간신히 새어나왔다.
그러나 리하르트에게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잠시 동안 조그만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듯이 가슴의 그 작은 살점을 문지르던 그는, 어느 순간 세게 비틀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가 하, 하고 웃는다.
“그래, 그게 네 비명이군.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네 비명은 어떤 소리일까 했는데.”
“……그, …―.”
뭔가 말하려는 듯 벌어진 입술은 이내 다시 닫혔다. 이로 악물어 말을 삼킨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졌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가슴을 주무르는 손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을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가슴에서 허리, 옆구리, 배.
마치 온몸을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한 군데도 빠짐없이 샅샅이 훑기라도 할 듯, 셔츠 위로 천천히 손이 오갔다. 그리고 그 손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일 때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움칫움칫 조그맣게 꺾인다.
리하르트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온몸이 손닿는 데마다 다 이렇게 민감해서야, 도대체 여자와는 어떻게 잔 거야. 설마 전희도 뭣도 없이, 그냥 박아넣고 싸기만 하고 끝냈나? 흥……, 매너라곤 없는 놈 같으니.”
“…―.”
크리스토프는 몸을 잔뜩 구부린 채―비록 그 위에 리하르트가 올라타고 있어 제대로 구부릴 수도 없었지만―이를 악물었다.
비웃음 섞어 혀를 차며 그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천천히 손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 위로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설마,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설마 그 나이 먹도록 동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한 번 말해 본다는 투로, 리하르트가 툭 말을 던졌다.
그 순간, 굳게 다문 크리스토프의 입매가 짧게나마 떨린 것을 리하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얼굴이 경악에 가까운 빛으로 굳어졌다. 크리스토프의 몸을 쓰다듬던 손마저 잠시 멈추었다.
“섹스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질 나쁜 농담은 걷어치우라는 듯 리하르트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지만,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더 세게 깨물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넋이라도 나간 듯 그를 내려다보다가, 하, 하고 헛웃음을 웃더니 말도 안 된다며 묻는다.
“농담이겠지. 그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잖아.”
처음에는 너무 낮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피라도 날 듯이 세게 입술을 깨문 잇새로, 크리스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이윽고 파문처럼 점차 커져, 곧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했, ……잖아.”
“아……그래, 했겠지. 그렇지,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 적이 없을 리가…….”
“네가……했잖아.”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크리스토프를, 기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끔찍하게 괴롭다 못해 잠시 제정신을 놓았는지도 몰랐다.
“뭐?”
리하르트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크리스토프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네가 했잖아……! 그때, 강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네가 나한테 했잖아, 그 짓을……!!”
이 미친놈, 이 변태새끼, 떨리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욕을 주워섬기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한동안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 올려놓았던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 움직임에 크리스토프 역시 덩달아 몸을 움츠렸다.
내가 너와, 너 따위와 그 짓을……, 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다른 데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혹시?”
“…―왜, 네가 한 짓이면서도 남에게는 말 못하겠나 보지? 나라고, 그런 말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까 봐! 그 따위 짓을 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 걸 몇몇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말을 떠들 것 같아?!”
크리스토프는 울컥 분이 솟구친 듯 외쳤다. 새파란 눈동자가 얼핏 젖어들어 유리처럼 반들거렸다.
머리끝까지 솟은 울화와 분노를 어쩔 줄 몰라 몸을 부들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표정 위로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빛이 언뜻 스쳤다.
“그래서 그런 말이 돌아다녔나…….”
한숨 섞인 혼잣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어느 순간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멎은 순간,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몸에 얹혀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리하르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얼간이 짓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 터무니없는 말까지 나돌게 만들었다……? 내가, 너한테 그 짓을 했다고? 이 내가?!”
그의 말투가 점차 거칠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굴욕을 맛보았다는 듯 하, 하고 코웃음을 친 리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똑똑히 알아두도록 해. 내가 확실하게 가르쳐줄 테니까. 남자가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선뜩할 정도로 나직하게 말을 마치며,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셔츠를 목깃부터 움켜쥐고 뜯어 버렸다. 얇고 부드러우나 튼튼하지는 못한 천조각이 힘없이 뜯겨져 나갔다.
걸레처럼 너덜거리며 어깨며 팔 쪽에만 걸쳐져 있는 천조각 아래에서, 새하얀 살갗이 드러났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지는 가운데, 리하르트는 두말없이 크리스토프의 바지까지 끌어내렸다.
당장 낯빛을 싹 바꾸며 온힘을 다해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부자유스러운 몸으로는 결국 무리였다. 정신없이 고함을 질러도 소용없었다.
“미친 새끼, 뭐하는 짓이야! 건드리지 마! 내 몸에 닿지 마!!”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서슬 퍼렇게 고함을 질러도 그 소리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리하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이내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는 실올 하나 남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마지막으로 벗겨낸 그의 속옷을 멀찍이 내던져 버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골적인 시선이 훑어내렸다.
“흥……. 남자를 상대로 과연 설까 싶지만…….”
리하르트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아무렇게나 훑었다.
무겁게 늘어진 성기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크리스토프는 얼어붙은 시선을 잠시 그의 사타구니에서 떼지 못했다. 경악과 혐오가 그 시선에 담긴다.
타인의 성기를 이렇듯 눈앞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과 살갗이 스치기라도 할까 봐 사우나 따위에도 간 적이 없었다. 공동욕실을 이용한 적은 있었지만 남의 물건 따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공중화장실에서도 옆에 사람이 있어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 자신의 성기라면 수천수만 번을 봤으니 남자의 성기가 낯설게 느껴질 이유 따위는 없는데도, 눈앞에서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리하르트의 성기는 명백하게
낯설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크리스토프의 아래를 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만다.
“사내놈의 물건 따위는 흉측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본 가운데 빛깔도 모양도 가장 예쁘게 생긴 물건이군.”
크리스토프는 하얗게 표정을 굳혔다.
몸을 건드리는 것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육체관계를 상징하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막연한
앞일을 끔찍하게 연상시킨다.
“리하르트. ……하지 마.”
창백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리하르트는 흐리게 웃었다.
“내가 뭘 할지는 알고 있나?”
“그걸로, ……내 몸을 건드릴 거잖아.”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성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몸이 움츠러든다.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러면서도 성기를 훑어올리다가, 여전히 힘없이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에서 결국은 손을 뗐다.
“역시 남자를 상대로는 서지 않는군. 덕분에 끝까지 가지는 못하겠으니 너로서는 다행이겠어. ……뭐 좋아. 반드시 박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
깔끔하게 아래쪽의 자극을 포기한 리하르트는, 곧바로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 올라탔다.
크리스토프는 펄쩍 뛸 듯이 몸을 움츠렸다. 대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벗은 몸과 벗은 몸이 노골적으로 부딪혔다. 살갗 위에 바로 닿는 살갗의 느낌이 더없이 낯설었다. 소름이 끼친다.
“하지……!!”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비명 같은 외침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미처 다 외치기도 전에, 억센 손으로 거세게 턱을 움켜쥐면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깨물었기 때문이다.
아픔보다도 그로테스크한 충격에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굳어지는 게 훤하게 느껴지는 듯, 그의 등을 어루만지듯이 쓸어내리던 리하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는다.
가슴이 맞닿았다. 배가 맞닿았다. 등에 두른 팔에 세차게 힘이 들어갔다.
마치 온몸이 붙어 버린 듯한 그 낯선 감각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보다도 생소한 감각은 입이었다.
잡아삼킬 것처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깨물었다. 가끔 뜨끔한 아픔을 느낄 정도로 거칠게 깨무는 사이사이, 갈 곳을 잃은 혀를 자신의 입속으로 빨아들인다. 꼼짝도
못하고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간 혀는 그의 혀와 뒤엉켜 미끌거리는 뜨거운 살점을 한참 동안 맛보아야 했다.
뜨거운 호흡이 타액과 함께 그 사이에서 오갔다.
질척하고 끈적한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때, 깨달았다.
분명 처음에는 무심하고 거칠기만 하던 리하르트의 혀가, 이가, 입술이, 언제부터인가 농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애가 타는 듯 초조하게, 점점 더 세게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빨아당긴다.
충격으로 떨림조차도 잊고 있던 입술이, 어느 순간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
크리스토프는 얼어붙어 있던 몸이 순간적으로 깨어난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입속을 헤집고 다니던 혀가 아직도 안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당혹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 시선을 헤매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아쉬운 것도 같은, 그래, 마치 정신없이 열중하던 장난감을 일시에 빼앗겨 버린 듯한 얼굴이다.
“가만히 있어. 어차피 이 정도야 애들 장난인데 뭘 그렇게 굳어 있어.”
무뚝뚝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목소리가 다시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내려왔다.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소름이 끼쳤다. 몸이 오싹했다.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가슴이며 배, 등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 따위가 세포 하나하나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돌리자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울컥한 듯,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고 강제로 돌렸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다시 입을 맞춘다.
“…―!”
하지 말라고 내지른 고함은 그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딘지 조금 전보다 더 초조하게, 조급하게,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입 안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혀가 닿는 곳곳마다 핥으며 빨아당긴다. 할 수만 있다면 통째로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목선이나 쇄골 따위를 조심스럽게 덧그리던 손은 어느새 가슴에 닿았다.
가슴 위에서 조그맣게 솟은 살점을 스치는가 싶던 손이, 그곳을 집요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그 순간 몸을 뒤틀며 요동쳤다.
견딜 수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소름끼치게 낯설고 선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저릿하게 타고 올랐다.
놔. 제발 건드리지 마. 낯설어. 낯설어서 견딜 수 없어. 나를 혼자 내버려둬.
크리스토프는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 마, 그만해, 소름이 끼친단 말야……! 속이 울렁거리, 아, 건드리지, 아, ……아, 아, …―!!”
떨리는 목소리는 크리스토프의 의지와 상관없는 밭은 소리를 내뱉었다. 희미하게 울음마저 섞이는 그 목소리를 억지로 삼키려 했지만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리하르트는 잠시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떠오른 빛이 뭔지, 크리스토프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리하르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 표정에는
어렴풋한 당혹감도 섞여 있었다.
“……여기가 좋은가 보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민감한걸. 아니면, 그래서 접촉기피증이 있었던 건가?”
비아냥거릴 셈으로 말하는 목소리마저, 어딘지 당혹감이 스몄다.
천천히 리하르트의 입술이 내려갔다.
크리스토프의 목을 훑고, 어깨선에서 쇄골을 따라 내려와, 이윽고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문지르던 가슴 가운데까지 닿는다.
잠시 망설이듯이 그 주위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그 위를 덮었다. 단단하게 솟은 살점을 혀끝으로 간질이다가, 곧 숨을 삼킬 정도로 세게 빨아당겼다.
“…―!!!”
때로는 이로 물고 잘근거리며 뿌리까지 뽑아낼 듯 빨아당기는 그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화급하게, 드러난 전선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요동쳤다. 온 힘을 다해, 죽을 기세로.
얼마간은 리하르트 역시 온 힘을 다해 크리스토프의 몸을 억누르고서 갓난아이처럼 그의 유두에 매달려 있었지만, 곧 그의 몸 위에서 비켜났다.
맞닿아 있던 가슴과 배도, 등을 꼭 끌어안고 있던 팔도 일시에 떨어져 나갔다.
피부를 태울 듯이 뜨겁던 체온이 사라지고 그 대신 크리스토프에게 익숙한 서늘한 공기가 피부 위를 감쌌다.
크리스토프는 온몸으로 숨을 헐떡이며, 부릅뜬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하고 망연히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서 반걸음쯤 떨어진 곳에 무릎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평소처럼 비웃는 얼굴이나 혹은 차갑게 내려다보는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리하르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그 표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희미하게 몸을 굳히고 만다.
리하르트의 성기가 일어나 부풀어 있었다.
거무스레하고 흉측한 살덩이는 혈관마저 돋우고서 크게 부풀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크리스토프는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몸이 떨렸다.
공포나 분노, 그런 감정과는 상관없이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와 맞닿는 것을, 몸이 받아주지 못했다.
리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싸늘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한다.
“새삼스럽게 왜. 이미 너는 나와 섹스를―그런 관계를 가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와서 몸을 사릴 것 없을 텐데.“그런 건 상관없어. 비역질을 하든 두들겨 패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나를 건드리지는 마!”
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크리스토프를 찬찬히 살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은 시선이 다시 온 길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크리스토프의 입술에 머무른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집어삼킬 것처럼 물고 빨았던 입술로 지그시 시선을 주다가, 천천히 눈길을 떨어뜨렸다. 맞닿아 끌어안았던 몸과, 뒤이어 발갛게 부어올라 젖어 있는 유두.
그리고.
“…….”
리하르트는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상한 것이라도 본 듯 약간 눈을 크게 뜬 그는, 곧 크리스토프의 얼굴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성기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이미 뻣뻣하게 굳어서 일어서 있는 그 물건을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제법 오래 훑어도 축 늘어져 힘을 잃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는 몇 번 훑고 나자 더욱 크게 부풀었다.
그런 리하르트를 경악스런 눈으로 보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비웃음과도 닮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아랫도리나 살펴보고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시지.”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아연하게 말을 잃고 만다.
자신의 성기가 비록 아주 약간이나마 힘을 얻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늘어져 있지 않고, 아주 조금 들떠 있다.
어째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 가신 얼굴에 눈만 커다랗게 뜬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모르겠다는 얼굴 할 것 없어. 쉽게 생각하면 될 일이지. 네 비틀린 정신구조나 결벽증에 가까운 예민성과는 별개로, 너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야. 네 몸이 터무니없이
민감한 거라고. ……좋겠군, 크리스토프. 괴로운 건 잠깐이겠어.”
그렇게 말하며 리하르트가 한 걸음 더 내디딘 순간,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납빛처럼 창백해졌다.
***
당연하게도, 말리크 일행은 가장 상석에―어르신은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앉아 있었다.
그 점은 물론 납득이 갔다. 이 자리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만찬이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십여 자리밖에 되지 않는 한정된 만찬석에 자신이 앉아 있는 이유를, 정태의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가장 말석을 주더라도 감지덕지하며―왜 불렀나
의아해하며―앉아 있을 텐데, 말리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태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재이 씨가 얼마 전 RCS 관련으로 연구를 마무리 지으셨다지요?”
“정재이 씨는 계속 UNHRDO에 계실 생각이시랍니까?”
“저희 측에서는 언제든 뛰어난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제 상사께서는 인적자원만큼 훌륭한 자원은 없다고 여기시는 분이라서요.”
“개인적인 접촉은 UNHRDO 측에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더군요. 그래도 형제라면 연락이 자주 되겠어요.”
열 마디에 한 마디씩은 반드시 정태의에게 말을 붙이는 말리크에게, 정태의는 빈 웃음을 웃으며 예, 글쎄요, 그러신가요, 아니오, 단답형 대답만을 건네었다.
솔직하다면 솔직할 수도 있지만,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태의가 프랑크푸르트로 갈 예정이었더라면 저도 모르게 ‘예,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말리크가 옆에 앉은 타르텐의 일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채를 슬슬 뒤적이다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르텐에서도 이 자리에 앉을 정도면, 승계 결정에 발언력이 있을 만한 사람일 성싶었다. 과연, 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들 대부분은 만만찮아 보이는 장년․노년의 남자였다.
그런 가운데, 한 자리가 눈에 띄게 비어 있었다.
말리크의 건너편, 정태의의 옆옆자리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자, 답은 쉽게 나왔다.
“호랑이 연고가 그렇게 독했나…….”
리하르트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정태의는 조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일레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곧 오겠지.” 하고 대수롭게 말할 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보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리하르트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정태의였지만,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말리크가 그 생각을 잘랐다.
“그러고 보니 정재이 씨가 얼마 뒤 프랑크푸르트로 가신다고 하던데, 모처럼 만나시겠군요.”
“예? 아……, 아뇨,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바로 옆에 앉은 남자의 모골송연한 형제상봉 주선계획을 떠올리곤 얼른 덧붙였다“굳이 꼭 만나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차후에 기회가 닿으면 만나려고요. 서로 아무런 무리가 없을 때요.”
정태의가 웃으며 말하자 말리크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 탓인지 저 ‘그렇군요’마저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정태의는 저 남자의 상관이라는 사람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납치감금에 가혹한 대가를 치른 그 남자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리해 보면, 말리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유회사와 맺었던 계약 건으로 왔다. 그리고 그 납치감금범은 말리크의 상관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는 정권의 암투를 벌이는 왕자의
동복형제의 피후견인…….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태의는 슬슬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더 생각하면 두통이 날 것 같아서 그건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머리를 식힐 셈 농담이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우디의 국유회사면 어디야. 설마 아람코 이런 데는 아니겠지? 하하.”
옆자리에 앉은 일레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정태의가 가볍게 한 말은 순수한 농담이었다.
“잘 알고 있군.”
그러나 가볍게 돌아온 말은 농담조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살짝 굳었다. 그리고 매우 미심쩍은 눈으로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괜히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농담이지?”
“농담 같나?”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가 없었다.
그 회사의 이름을 댄 이유는 그저 정태의의 짧은 경제지식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우디의 국유회사가 그곳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는 아람코는 아주 잘 나가는 비상장기업을 말하는 건데…….”
혹시라도 동명의 다른 회사가 있나 싶어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레이가 역시나 가볍게 대꾸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비상장기업 가운데 거기보다 기업가치가 높은 곳은 없겠지.”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두통이 심해질 것 같았다. 갑자기 저 앞 귀빈석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말리크가 심상찮아 보인다.
“라만이라는 그 남자……, 아람코의 요직에 앉아 있었어?”
정태의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아주 잠시 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아아, 하고 말한다.
“그렇군, 오해가 있었어. 라만은 저 남자의 상관이긴 하지만 아람코와는 관계없어.”
“뭐야, 그게.”
“저 남자의 상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 파이살이지. 원래 알 파이살의 수석 수행원이었으니까. 알 파이살의 사업체로 가지 않고 아람코로 가서 적을 두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금도 알 파이살의 수석 보좌로 보면 돼.”
“……. 좀 더 쉽게 말해 주면 고맙겠는데.”
“아람코와 파이살 사이에 협의가 있어서, 아람코에서는 차관 변제 협상에 대한 전권을 파이살에게 넘겼어. 그렇기 때문에 저 남자가 아람코에서 일시적으로 자리를 얻은 거지.
아마도 이번 일이 끝나면 그는 다시 파이살에게 돌아가겠지.”
“아니 좀 더 쉽게, 쉽게.”
정태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문지르며 말했다.
물 잔으로 가볍게 입술을 축인 일레이는, 아주 쉽게 말해 주었다.
“차관 변제에 있어 실질적인 채권자는 알 파이살이라고 보면 된다는 뜻이다.”
“좋아. 아주 이해하기 쉽군.”
정태의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 사용인에게 부탁해서 받은 맥주잔에 입을 대었다.
알 파이살.
작년 가량까지 몇 년 이상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 내부에서 암암리에 벌어졌던 암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파벌의 주요 인사인 알리 왕자의 동복동생이다.
비록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빠졌다고는 하나, 그 정도 규모의 국유기업과 단독으로 협의를 할 정도라면 그 권력은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남자는―.
“라만의 후견인이란 소리지…….”
어쩐지 맥주 맛이 쓰구나, 정태의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게다가 아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후견인이기도 하지.”
정태의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일레이가 덧붙인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 때문이다.
아까부터 말리크라는 남자가 정태의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라만은 정태의를 싫어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처음 볼 때부터 정태의를 싫어했다.
“심지어 그 멋진 별저를 그렇게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밉살스러웠을까. 아무렴.”
정태의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그 멋진 별저를 그렇게 폐허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고, 모르겠다. 그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기만을 기원해야지.
정태의가 가뿐하게 한숨을 쉬곤 다시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리하르트가 뒤늦게 들어왔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하고 두루 사과를 하며 빈 자리에 앉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에 섞여들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리하르트가 묻자 말리크는 넉넉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는 요리마다 대단히 훌륭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하하, 독일에 오실 때면 언제든 편하게 들러 주십시오. 이번에는 겨우 며칠밖에 머무르지 못하신다니 퍽 안타깝습니다.”
틀에 박힌 매뉴얼 같은 대화인데도 리하르트의 입에서 나오면 정말로 순수한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저 남자의 대단한 점 중 하나였다.
정태의는 도무지 가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친근한 미소가 표정에서 떨어지지 않는 리하르트를 감탄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와 말리크의 사교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산책을 할 겸 저택 바깥을 둘러보았는데, 숲에 마련된 산책로가 아주 근사하더군요.”
“아아. 그 뒤쪽으로는 산자락과 이어져 있어서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시면 길을 잃기 쉬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리 험준한 산세는 아니니 큰 문제가 생긴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지만요.”
“허어, 산이라. 좋군요. 제가 젊었을 때에는 휴가 때면 종종 사냥을 하러 가기도 했었는데, 일이 바빠진 뒤로는 통 즐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시면 여기에 머무르시는 동안, 내일은 이미 예정이 잡혀 있으시니 모레쯤 가볍게 달려 보시겠습니까? 마침 이 시기 즈음이면 산맥을 타고 붉은 여우가 내려와 있을
무렵입니다.”
“붉은 여우라, 퍽 오랜만이군요.”
사냥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빛내며 반색을 하는 말리크를 곁눈질로 보며, 정태의는 이제 한동안은 그가 자신에게 정재의를 주제로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아 약간 안도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역시 원치 않는 화제를 돌리는 데에는 상대가 좋아하는 또 다른 화제를 던져 주는 게 가장 좋다.
정태의는, 비록 정태의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닐 테지만 딱 좋은 화젯거리를 던져 준 리하르트에게 고마워하며 식사를 즐겼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흘끔흘끔 문 쪽을 보았다.
리하르트가 오면 당연히 크리스토프도 함께 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리하르트는 혼자 온 모양이었다. 약간 뒤늦게 따라올까 했는데 이미 식사가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걸 보니, 이 자리에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아까 엿들은 바로는 리하르트와 꽤 험악하게 싸우는 것 같던데, 그러고서 그가 혼자 온 걸 보니 어쩐지 좀 불안해진다.
크리스토프쯤 되는 인물이 어느 구석에서 죽어 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런데 크리스토프는 같이 안 왔나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서 정태의가 슬쩍 물었다.
선선하게 웃음을 짓고 있던 얼굴 그대로 리하르트는 정태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
기분 탓인가. 순간적으로 시선이 좀 따갑게 느껴졌는데.
그러나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보았을 때 리하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절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는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지금 자리에 누워 있을 겁니다. 그렇지, 식사를 마친 뒤에 혹시 괜찮으시면 한 번 들여다봐 주세요. 정태이 씨가 가면 좋아할 테니. ……깨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걱정스러운 듯 약간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그에게 정태의는 아, 예, 하고 대답했다.
저렇게 말하는 투를 보니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크리스토프와 거의 박빙으로 싸우곤 하는 리하르트는 비록 이마나 목덜미에 상처 처치를 받은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매우 멀쩡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크리스토프에게 들러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포크를 놀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가 서늘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크리스토프를 보러 가도 불쾌하지 않겠나?”
일레이의 나직한 말에 리하르트는 기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아니. 내가 왜 불쾌하겠어.”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리하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릭. 서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일이란 게 있지 않나?”
일레이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하나 단호하게 말한다.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네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아. 나는 이 녀석이 크리스토프를 보러 가면 불쾌하니까, 굳이 이놈을 보내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뭘 보여 주고 싶은 건지는 알겠지만.”
리하르트는 잠시 일레이를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언뜻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살짝 어깨를 추어올린다.
“릭, 나는 다른 뜻은 없어. 그저 그들의 사이가 좋으니까 가엾게도 자리에 누운 크리스토프의 상태라도 보러 가 줬으면 하는 거지.”
“그렇게 가엾으면 네가 돌보든가.”
일레이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정태의에게까지 다다르지 않을 만한 성량은 아니었다.
뭔가 미묘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 그리 상쾌한 느낌은 아니다.
리하르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일레이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뭐야. 크리스토프, 많이 안 좋은 건가?”
정태의는 그들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을 타서 슬쩍 말을 섞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미묘한 불온함에 정태의가 입매를 설핏 찡그렸을 때, 리하르트가 일레이를 대신해서 조용히 대답했다.
“크게 걱정할 바는 못 됩니다. 요즘 심적으로 많이 지치고 체력도 떨어져 있었는지, 약간 미열이 있을 뿐이에요, 지금은.”
“하아……, 예…….”
리하르트는 새 접시가 나오길 기다리며 냅킨으로 입가를 가만히 눌렀다. 그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태의가 알 수 없는 애매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리하르트는 문득 생각난 듯이 근처 자리에 앉아 있던 당숙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백부님, 작은숙모님을 곧 드레스덴으로 모실까 합니다만.”
그러자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당숙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작은숙모라고 하면……?”
“비앙카 숙모님, 그러니까 크리스토프의 어머님 말입니다.”
리하르트의 담담한 대답에 대해, 당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의아하게 눈썹을 찌푸리고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흠, 하고 다시 물었다.
“네 말은, 그녀를 다시 타르텐으로 불러들이겠다는 뜻이냐?”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승계일도 다가오고, 크리스토프도 다소 불안정한 것 같아서 그녀가 잠시 동안 머무르면 좀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뿐입니다.”
그러자 당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곧 승계일이니 다른 사람들도 모일 때가 가까워져 오는구나. 네가 좋을 대로 하려무나.”
리하르트는 믿음직스러운 웃음을 짓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크리스토프의 어머니가 오면 그는 더 불안정해질 거다언젠가 들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 녀석이 다른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게, 어머니란 거지.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어머니.
그 말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새어나오던 우아하고 고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수화기를 받아들던 크리스토프의 얼굴도.
창백하게 굳어지던 얼굴. 푸르스름하게 떨리던 입술. 그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수화기를 향해 조용하고 침착하게 속삭이던 짤막짤막한 대답들.
금세라도 깨어질 얄팍한 유리처럼 불안정한 그 창백한 얼굴이, 지금 옆에서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는 리하르트의 얼굴과 겹쳐졌다.
정태의는 가만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사라졌다.
그때 문득, 톡톡, 정태의의 바로 앞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하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일레이가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계일이 다가오면 가까운 친척들은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한 타르텐으로 찾아오지.”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역시, 늦든 빠르든 어차피 곧 타르텐으로 올 터였다.
조용히 사실을 되새겨 주는 일레이를 잠시 마주보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가만히 대답한다.
그의 말대로, 승계 결정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르텐에서 머무를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될 날도.
[4권으로 계속]
...

Bạn đang đọc truyện trên: Truyen2U.P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