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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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리하르트 타르텐은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미움, 슬픔, 괴로움, 시기, 질투, 원망, 그러한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어떠한 감정이며,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 자신이 그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도,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도, 그들로부터의 신뢰와 애정도, 필요한 것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특함도, 그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곤란함이나 당혹함, 여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 조각처럼 생긴 소년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
“크리스토프다.”
누군가 속삭였다.
숲 어귀에 선 아름드리나무 그늘에서, 바위나 나무등걸 따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던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숲 안쪽, 말발굽 소리가 따각, 따각
느리고 경쾌하게 다가오는 쪽으로 시선을 준다.
하얀 말 위에서 그 조그만 체구를 곧게 버티고 앉은 소년이 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소년들을 보고 잠시 귀찮다는 얼굴을 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말을 달리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요전번에 부호 해석, 크리스토프가 막내숙부님보다도 빨리 풀었다면서.”
“체……. 그거 빼곤 볼 것도 없잖아, 뭐.”
시기 어린 속삭임을 들으며 리하르트는 말없이 웃었다.
그것 빼곤 볼 것도 없다고? 천만에. 모든 점에서 뛰어난 가운데 그 부문에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거다. 소년들은 그런 질시 어린 말을 내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은 분명 천재였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보다 더욱 훌륭한 결과를 이루어내는 드문 인종이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런 점에서 질시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크리스토프보다 노력을 기울여야 하긴 했지만, 크리스토프만큼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주변에서는 친구들이―때로는 어른들까지도―그들을 경쟁자로 규정하고 사사건건 비교를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싫어하지도 않았다. 늘 외따로 떨어져 지내는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주위에 모여들어 함께 지내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들과 신뢰를 나누면 그걸로 족했다. 그들은 리하르트를 믿고 따랐고, 리하르트는 그들을 든든하게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다.
“크리스토프!”
소년들 중 누군가 크리스토프를 불렀다. 말을 타고 그들 옆을 스쳐가던 크리스토프는 성가신 듯 그들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그러자 부아가 난 듯,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함을 친다.
“늘 혼자서 외따로 다니는 사람은 타르텐을 이을 수 없어!”
타르텐을 잇는다. 그것이 그들이 최고로 치는 가치였다.
크리스토프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별달리 상대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태도가 거슬렸는지 약간 짜증이 밴 목소리로 불쑥 내뱉는다.
“늘 무리지어 다니는 네가 이으려고, 그럼?”
말을 던진 소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애초에 승계 후보조차 되지 못했던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크리스토프를 노려봤지만 그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는 멍청이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도 않았던 리하르트는 뒤에서 끼어들지 않고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소년이 급기야 눈물을 비죽거리자 그제야 괜찮다며, 그렇게 마음 상해할 것 없다며 너그럽게 웃으면서 그를 다독여 주었다.
그때 리하르트는 보고 말았다.
그들을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리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리하르트를 비난하는 것처럼.
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리하르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던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어떠한 감정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리하르트는 그 시선을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 누군가가 크리스토프의 그 눈길을 본 모양이었다. 마침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볼멘 목소리로 외친다.
“너는 왜 리하르트를 싫어해?”
아직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 자체가 비난거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리하르트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잘해 주고 감싸 주는, ‘누구나 좋아해야만 할 훌륭한’
아이였다“리하르트는 늘 우리를 도와주고, 또 너처럼 그렇게 거만하게 굴지 않아.”
다른 아이도 거든다.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말을 섞고 싶지가 않다는 눈치였다.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그때.
“너는 내가 왜 싫어?”
불현듯, 충동적으로.
리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그는 타인에게 그런 물음을 던진 적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으면 모른 척하면 되고, 좋아하는 눈치면 웃어 주면 되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물음을 던지고 내심 스스로를 의아해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무시하고 가려나 했지만, 천천히 눈살을 찡그린
크리스토프는 쌀쌀맞게 말했다.
“너는 늘 당연하게 위에 서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고 있잖아. 그러면서 사람 좋게 웃는 게 싫어.”
크리스토프는 그 말만 하고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돌아섰다. 다각다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여태 당연한 듯이 친구들을 이끌며 그들의 신뢰를 모았던 그는. 크리스토프가 정확하게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스스로조차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을.
그 순간 리하르트는 부정적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치와 자괴감, 그것을 깨닫게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노력으로는 소용없이 처음부터 사고와 통찰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에 대한 질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폭로해
버렸다는 원망, 그 낯선 감정들로 인한 당혹감과 혼란.
자신의 심장에서 시커먼 싹이 흉하게 자라나 비죽한 가시를 드러내는 그 불쾌한 감각을, 그는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스스로조차―눈치채지 못했던 추악한 자신을 꿰뚫어 보였다는 그 부끄러움이, 분노와 미움과 원망으로 자랐다.
“위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건 저인 주제에.”
“크리스토프는 원래 저렇잖아. 성질이 고약하게 비뚤어졌어.”
아이들이 한 마디씩 투덜거리는 소리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리하르트는 겨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닌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만해져 있었나 봐. 혹시 내가 불쾌하게 만든 적이 있다면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한 얼굴로 난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펄쩍 뛰면서 그렇지 않다고, 크리스토프가 멋대로 한 말이지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리라는 걸. 그리고 자신은 좀 더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리라는
걸.
바로 몇 분 전까지는 의식하지도 않고 행했던 그런 일들을, 그는 이제 계속해서 의식하게 된 것이다.
*
한 번 싹이 터 버린 감정은 아무리 잘라내고 잘라내도 뿌리 뽑히지 않고 다시 끈질기게 싹을 틔웠고, 리하르트는 그 뒤부터 크리스토프를 주시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같이 경쟁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리하르트에게는 다른 경쟁자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오로지 크리스토프만을 주시했다. 가슴속에서 시커멓게 가라앉은 불쾌한 감정들을 어렵잖게 표면의 밑바닥에 가두며.
그러나 그런 흉측한 감정들을 크리스토프는 늘 꿰뚫어 보았고, 점차 리하르트는 그의 앞에서는 그런 감정들을 숨겨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리하르트는 늘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언제나. 꿈속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어떻게 하면 그를 다른 누구의 방해도 비난도 없이 가장 철저하게 자신의 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인지만을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 즈음에는 이미 두 사람은 주위에서도 눈치챌 만큼 ‘사이가 나쁜 관계’였고, 그럴 무렵이었다.
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리하르트의 동생이 죽고, 크리스토프가 동생의 묘에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리하르트는 그때 웃었다.
동생의 죽음 때문에 한없이 슬프고 괴로운 것과는 별개로, 크리스토프가 한 짓 때문에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그는 당당하게 크리스토프를 싫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흉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린 속내를 그대로 부딪쳐도,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얼마나 사랑하는 동생이었던가. 리하르트가 더없이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의 죽음에 크리스토프는 오물을 끼얹었다.
이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당히 긴 시간을 인내한 뒤 절대적인 위치에 서서 그에게 어떠한 짓을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으리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 관한 한은 면죄부를 받았던 것이다.
자신의 의식, 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1. Arabian business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자신은 모르는 것.
자신에게는 생경한 것.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것.
처음부터 자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존재하는 것.
그런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아픈 것은 괜찮았다.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로 인해 어떤 기분이 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낯선 것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낯설다……? 글쎄. 타인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나도 그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침대에서라면 별개의 이야기지만, 일상생활에서
남과 붙어 있으면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하지만 낯설다는 건 잘 모르겠군.’
언젠가 동료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크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서 기피당하는 성질을 가진 그 동료는, 흥미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낯설 수는 없을 텐데. 일단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아, 그래, 네 경우는 유모였지, 어쨌건 남의 손을 타지 않으면 갓 태어난 인간은 살 수 없으니까. 타인과의 접촉이
아예 낯설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기억이 안 나는걸.’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말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일은 뭐든 스스로 했었다고. 유모가 식사를 준비해 주거나 입을 옷 따위를 챙겨 주긴 했지만 입에 대거나 몸에 걸치는 건 내가 했었단 말이야.’
동료는 흠, 하고 중얼거렸다. 관심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네 일을 왜 나한테 말해,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어차피 그런 놈이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뭔가를 바라고 그에게 말한 건 아니었다. 그저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또한 어릴 적부터 알아왔기 때문에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어서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다.
‘상관없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다른 사람과 닿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거나 녹아 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원하기만 하면 네 쪽에서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도 문제없고. 어차피 너는
낯선 걸 싫어하니까, 사람도 낯익은 사람만 만나. 그들은 알아서 너랑 닿는 걸 피할 것 아냐.’
크리스토프는 그의 무심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여태껏도, 그 때문에 불쾌한 일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별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래, 불쾌감이다.
누군가와 접촉할 때의 그 낯선 감각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걸 불쾌감이라고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남과 닿지 않으면 돼. 자신 쪽에서 건드리는 건 필요하면 할 수 있으니까, 여태껏과 마찬가지로 별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면 어떻겠냐는 말이 가끔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념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답시고 앉아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의사가 ‘자, 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나 괜찮아졌을지 어디 한 번……’, 이러면서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기회조차 가져 보지 못한 그 약점은, 지금에 와서야 크리스토프를 무섭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소름끼치고 낯선 느낌 그대로.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그저 문지르거나 핥고 빠는 것뿐이라고 했었지. ……그 말을 한 게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절대로 믿지 않았을 거다. 이 나이에 너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비웃음이라고 판단할 이성조차 없이, 그저 두뇌는 오로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만으로 움직였다보다 이성적으로 찬찬히 생각을 했더라면, 어쩌면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한 팔이 묶여 있는 상태라 해도,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붙잡고 누르며, 등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어깻죽지 아래로 등과 허리, 골반까지 다른 사람의 체온과 바싹 맞붙었을 때.
사고가 날아갔다.
이 상태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대를 때려눕혀서 맞서기보다 먼저, 그저 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다. 몸을 세게 부둥켜안는 이 낯선 느낌을.
하지 마, 그러지 마, 입술이 떨렸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싫어? 하지 말라고?’
거칠어진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그러나 아픔보다는 섬뜩한 감각이 몸을 뒤흔들었다.
‘나도 끝까지 갈 생각 따위는 없어. ……없었지. 남자를 상대로는 설 리도 없었거든. 그런데…….’
크리스토프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이 단단히 감싸안은 그 팔은 마치 그대로 몸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뱀이 허약한 희생물을 발견해 그 긴 몸으로 친친 동여감은 것처럼, 크리스토프를 끌어안은 손은 결코 그 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
그 짧은 말과 함께.
뇌가 흔들릴 것 같은 충격.
‘배설물 외의 다른 건 닿은 적 없지?’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그 깊숙이 살에 묻혀 있던 곳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퍼득거리며 몸을 요동치며, 경악으로 부릅뜬 눈으로 등 뒤의 그를 돌아본다.
바로 어깨너머에, 어깨선을 따라 혀로 덧그리고 있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반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서.
‘더, 더럽…….’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말마디가 나오다 말았다.
먼지 하나라도 견딜 수 없어 매일같이 적어도 두 번은 욕실에 들어가 온몸을 신경질적일 정도로 씻고 나오는 크리스토프였지만, 그래도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조차
건드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건드리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 같은 결벽증도 네 몸에 더럽다고 생각하는 곳이 있나? 그래, 그렇다면 남자끼리 ‘고작해야’ 핥고 빨 때, 여기도 핥고 빤다는 건 생각도 못해 봤겠군.’
‘……!!’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일순 온몸을 감싸안은 이 낯선 타인의 체온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더러운, ……!’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을, 그 남자는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분 좋게 눈이 가늘어진다.
불쾌해졌다.
이 남자는 늘 친절한 척 웃었다. 눈동자에 전혀 웃음기라곤 없는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그를 두고 웃는 얼굴이 다정하다고들 했다. 모두들 눈이 비뚤어졌다.
입을 위로 휘고 눈을 약간 구부린다고 해서, 저 냉정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다정하다고 하는 눈이라면 차라리 뽑아 버리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의 눈동자가 웃을 때는 오로지 이런 때뿐이었다.
그 비틀린 속내로 꾸민 짓이 멋들어지게 성공했을 때.
‘……!! 아, 그, ……!’
그러나 그때, 그 더러운 곳을 둥글게 쓰다듬으며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그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몸이 크게 떨렸다. 허리 아래가 움찔 굳어졌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다다른 사람과 이렇게 바싹 닿아 있다는 것도, 저 더러운 곳을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는다는 것도, 그 안쪽으로 조금씩 파고드는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도, 그것이 이 빌어먹을
남자라는 것도.
끔찍했다.
이 남자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상변태일 뿐만 아니라 더러운 걸 좋아하는 미친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차피 어디를 쓰다듬어도 크리스토프가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저 더러운 곳을 집요하게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불쾌한 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더러운 놈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는데.
이 남자를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건, 건드리지 마…….’
크리스토프는 간신히 속삭였다.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웃기만 했다. 동시에 아래를 파고들던 손가락을 더 깊이 밀어넣었다.
몸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파고들던 손가락은 어느 정도 감각이 익었는지 점차 빨라졌다. 게다가 어느 결엔가 하나 더 파고들고 있었다.
아래를 마구 휘저어 대는 그 감각은, 마치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두뇌의 약한 살점을 마구잡이로 휘저어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쓰다듬고 문지르던 가슴 역시, 그 끝의 연약하고 조그만 살점을 세게 잡아당기거나 눌러 댄다. 이미 뾰족하게 부어서 빨갛게 부풀어 있는 살점 역시,
짓누를 때마다 몸속이 반사적으로 흠칫흠칫 떨렸다.
뭐야, 이게.
끔찍하다.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그 등에도 남자의 가슴이 바싹 닿아 있었다. 땀이 배어나와 미끈거리며 마찰해서, 그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온몸이.
알몸으로 드러나 있는 온몸이.
이 남자에게 감싸여 있었다.
마치 거대하고 압도적인 뭔가에 꼼짝도 못하도록 감싸인 것처럼, 몸의 어느 곳이라도 이 남자와 닿아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이 난다.
‘으, ……, 윽…….’
위장이 울컥 조여들었다. 속에서 토사물이 치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가 귓가에 대고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건드리는 게 구역질이 나서, 나에게 다리를 벌렸다고 해서 토하기라도 한다면, 네 토사물 위에 눕혀 놓고서 쑤셔박을 거다. 내가 건드리는데 구역질하지 마.’
속이 뒤집어져서 생리적으로 눈물이 배어나온 눈을 커다랗게 홉뜨고, 크리스토프는 그를 쳐다보았다.
저 더럽고 소름끼치는 말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그 신경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여태 그를 실제보다 훨씬 더 좋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절대로 상종해서는 안 될 남자였다.
‘쑤, 쑤셔박, …….’
뭘,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얼굴이 새파래진다. 토사물을 다시……라고 생각하자 속이 더더욱 뒤집어졌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그가 떨어져 나갔다. 크리스토프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얼얼할 정도로 아래를 파헤치던 손을 떼고, 몸을 떨어뜨렸다.
반사적으로 크리스토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는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었지만, 몸에는 다시 서늘하게 공기만이 닿는 감각이 돌아왔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안도한 얼굴을 한 것도 잠깐.
그 얼굴을 지그시 살피던 그 남자가 픽 웃었다. 어딘지 기분이 상한 듯 뒤틀린 웃음이다.
‘시간이 없어. 곧 만찬회에 가 봐야 하니까. 핥고 빠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네게 알려주겠다고 했던 것부터 알려주도록 하지. ……그래, 네가 더럽다고 했던 걸로.’
그렇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엎드려 있던 크리스토프의 몸을 뒤집었다. 허리를 붙잡아 퍼뜩 몸을 뒤틀었지만 단단히 움켜쥔 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팔을 묶인 채 비스듬하게 천장을 보고 누운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미는 남자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남자의 사타구니에서 흔들리는 성기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아까보다 더욱 힘있게 위를 향해 고개를 들고 치켜선 그 물건은, 아까 반쯤 일어선 것을 보았던 때보다 훨씬 흉흉했다. 두텁고 굵게 부풀어 핏줄이 불거진 그 거뭇거뭇한 물건이,
마치 끔찍하게 소름돋는 흉기처럼 보였다아니, 생각해 보면 흉기처럼 느낄 이유라곤 없는데.
저기서 총알이나 칼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저걸 자신의 몸에 대고 문지르…….
‘……. 리하르트……, 하지 마.’
핏기를 잃어 푸르다 못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간신히 그 말이 새어나왔다.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저 물건 자체도, 씻거나 볼일을 볼 때가 아니면 손에 쥐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럽지만, 그보다 저기에서는 더욱 더러운 액체가 분비될 때가 있었다. 특히나 저렇게 단단히 발기해
있을 때에는 더욱.
저 흉측하고 불쾌한 물건을 자신의 몸에 대고 문지른다는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것 같은데 만에 하나 그 분비물이 묻기라도 한다면…….
얼굴이 노래졌다.
‘하지 마? 내가 뭘 할지는 알고 있나?’
그 남자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반쯤은 재미있다는 듯, 반쯤은 의아한 듯.
그 미묘한 말투에서, 크리스토프는 이 남자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불쾌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더듬더듬,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나……, 나한테 대고, 볼일이라도 보면, ……정말로, 맹세코, 죽여 버리겠어.’
크리스토프는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정말로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아니, 지금껏 건드린 것만 해도 머릿속이 거의 미쳐 버릴 만큼 끔찍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이 남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얼음처럼 굳어 있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에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표정 없이 크리스토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이마를 천천히 문질렀다. 주름진 미간도 문지른다.
‘……. 시들게 하려는 속셈이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 남자를, 크리스토프는 경계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들다니 뭐가, 저건 또 무슨 흉악한 은어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남자는 문득 눈을 들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시선이 몸 위를 훑는다. 핥는 듯한 시선.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본 남자는, 문득 눈썹을 찡그렸다.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크리스토프. ……그렇게 노려보면서도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야, 더 서 버린단 말이야.’
나도 설마, 네가 진저리를 치는 꼴을 보고 이렇게까지 아래가 당길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남자의 얼굴 위로 얼핏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의 손이 사타구니를 훑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간다.
여전히―아니, 기분 탓인지 한층 더 흉포하게 고개를 든 듯한 그 물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남자의 시선이 못박혔다. 문득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 불현듯 크리스토프는 깨달았다. 이 남자도 긴장하고 있었다. 공포에 가까운 경악으로 움츠러든 크리스토프처럼, 어느 상황에서든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이 남자 역시 심장이
평소보다 한 뼘쯤 높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말야. 아래가 아플 정도거든. 도무지 그냥은 시들 수 없을 만큼.’
그 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크리스토프의 위로 엎드렸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잡아 등 뒤로 밀어넣어 버리고, 두 허벅지를 움켜쥐고 크리스토프의 머리 위까지 밀며 들어올렸다.
무릎이 머리에 닿을 만큼 몸이 굽어졌다. 근육이 당길 정도로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가까이 보였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뭘 하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흐트러진 머릿속에,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표정 없는 얼굴이 크리스토프의 치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런 곳은 처음 본 사람처럼, 세세한 모양 하나하나까지 신기하게 살피듯이, 그 시선이 다리 사이에 못박혔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갑자기 얼굴에 피가 올랐다.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는 손의 감촉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갑자기 무서울 만큼의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틀었다. 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수치로 뜨겁게 물든 머릿속만큼 얼굴도 뜨거웠다. 귀도, 목덜미도,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치부에서 떨어져 크리스토프의 얼굴로 옮겨온 시선은, 마치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뚫어지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놔, ……보지 마!’
수치스럽고 분해서, 머릿속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도록 흐트러져서, 크리스토프는 눈시울이 발갛게 뜨거워진 줄도 몰랐다.
문득 허벅지를 쥔 손에서 힘이 약간 빠지는가 싶었다.
그 다음 순간.
‘……! ……!! ……,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신음도, 고함도,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말을 하는 두뇌의 작용마저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뭐가 뭔지 알 수도 없었고, 제대로 된 생각이나 판단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은 온통 으깨어져서 뒤섞인 것 같았다.
눈을 더할 수 없이 커다랗게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리 사이, 바로 조금 전까지 손가락이 드나들었던 그 속으로, 좁은 틈을 억지로 벌리며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잘 들어가지 않아서 초조한지 두꺼운 끄트머리가 뱃속을 거칠게 파헤치며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려고 밀려들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몸속에 쐐기라도 박는 것처럼 쾅, 쾅, 쾅.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빠르게 몸속으로 퍼억 박혀들었다 약간 빠져나가고, 다시 후려치듯이 퍼억 밀고 들어왔다가 조금 물러서기를 거듭했다.
속에 든 것이 모두 밀려 구겨지는 것 같다. 아픔보다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끔찍한 압박감. 짓눌려서 터질 것 같았다.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떨리는 입술로 들리지 않는 외침을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나직하고 거친 숨이 섞인 신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몸속 끝까지, 끝까지, 몸을 통째로 꿰뚫어 버린 것처럼 꽉 들어찬 뒤에야, 겨우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들어설 수 없는데도 아직 부족한 듯, 어딘지 조급하게 몇
번이고 허리를 더 추어올렸다.
‘……!!’
머릿속이 시커멓다가 빨개졌다가 하얘졌다. 뭐가 뭔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와 맺혀 있었다. 눈앞이 부옇다. 뭔가가 뺨을 타고 흘러 귀까지 적셨다.
다리 사이가 뜨거웠다. 화끈거리며 얼얼한 감각이 온몸의 다른 감각을 빼앗아간다. 그래서 그가 굶주린 듯이 입술을 겹쳐 오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반사적으로 움찔, 몸이
움츠러들 뿐이다.
그러나 몸이 움츠러들자 아래의 뻐근한 아픔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져서 숨을 삼키고 말았다.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 짐승 같은 짧은 신음이 탄성처럼 흘러나온다.
‘……크리스토프, 솔직하게 말해.’
거친 숨결 때문인지, 혹은 감각이 미쳐 버린 탓에 청각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가 몹시 거칠게 들렸다. 사냥감 위에 올라타 살점을 한가득 베어문 것처럼 잔혹하게 흥분된
숨결이 크리스토프의 귀를 태웠다.
‘나 외의 누군가에게 다리를 벌린 적, 있나?’
‘……?!’
‘다른 놈 앞에서 알몸으로 사타구니를 벌리고 흔들어 댄 적이 있냐고 묻잖아.’
크리스토프는 정신이 아득한 듯 창백한 얼굴이나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시선을 떠올렸다.
눈앞이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팔에 눈가를 비볐다. 팔이 흠뻑 젖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시야가 아득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야 하는 건 오히려 나인데노려볼 힘도 없어, 아득한 눈을 겨우 깜빡였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남자는 서로 사타구니의 살이 빡빡하게 맞물려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굵게 발기한 성기를 간신히 받아들여 찢어질 듯 충혈되어 벌어진
입구를 엄지로 덧그린다.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움칫 떨렸다.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조여 대면서 빨아당길 줄 알 턱이 없지. 아닌가?’
‘…―.’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서린 악의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미칠 듯 분이 치밀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사람을 괴롭히면서 심지어 지독한 말로 조롱하고 모욕까지 주고 있다.
‘리, 하르, ……, …―죽……!’
그러나 짤막짤막하게 겨우 뱉어내는 말을 가로막으며, 그는 크리스토프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는 크리스토프의 입을 벌리며, 그는 잔혹한 흥분이
떠오른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사내놈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동네에서, 너 같은 놈이 멀쩡하게 있었을 리가 없잖아. 모두 다 순진한 척 연기를 한 게 아니냔 말이다, ―이 요부야.’
화가 치미는 듯 욕설을 덧붙이며, 그는 갑자기 다시 한번 허리로 크리스토프의 사타구니를 후려갈기듯 세차게 밀어넣었다.
퍼억,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렸다.
몸속을 빡빡하게 벌리고서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일은, 다리 사이에 몰린 감각이 너무도 절실하게 온몸의 감각을 빼앗아,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입술을 깨무는 느낌도, 혀를 빨아먹는 느낌도, 온몸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가끔 울컥한 듯 숨이 막히게 부둥켜안는 느낌도, 아득하게 흐려졌다.
오로지 몸속을 찢어 버릴 듯한 감각만이 소름끼치게 선명해서, 끊임없이 허리가 부들거렸다.
‘이 몸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런 놈이 이렇게 찰지게 빨아당기면서 허리를 흔들어? 하, 웃기는군. ――말해 봐. 내가 몇 번째인지.’
쾅쾅쾅, 쐐기를 박아넣는 세차고 급격한 움직임이 심장 고동과 함께 몸속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은 들어올 곳도 없는데 계속해서,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질퍽질퍽하게 뭔가
엉덩이골을 따라 타고 흘러 소름이 끼쳤다.
크리스토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더 이상은 죽여 버리겠다거나, 그냥 두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주 약간이라도 더 견디기 쉬운 상태로.
‘움직, ……움직이지, 마, 숨, 숨이 막…….’
잠긴 목소리는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후둑후둑 눈물이 쏟아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두둑 굴러 떨어져 귓바퀴에 고였다.
‘……, 눈물도 파란색일 줄 알았는데.’
입술 위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입술이 간지럽다.
곧 눈가로 다가와 눈가를 핥는 혀가 뜨거웠다.
그러는 동안, 아래를 두들겨 대던 허리가 문득 멎었다.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비집어들고 있던 성기가 부풀어오르는 듯싶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낮은 탄성이 얼굴 위에 바싹 닿아 들려왔다. 눈가에 뜨거운 입김이 닿는다.
그와 함께 몸속에 가득 차오르며 터져 나오는 질량감.
몸속에 쏟아붓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그 느낌에 크리스토프는 몸서리를 쳤다.
몸이 절로 얼어붙었다. 홉뜬 눈에서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아픈 것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확연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누군가와 몸이 정말로 맞붙어 있다는 실감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
새파랗게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크리스토프의 위에서, 남자는 얼마 동안 그를 숨 막히도록 부둥켜안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끔 허리가 떨릴 때마다, 멈춘 줄 알았던
사정이 이어졌다.
사정射精새하얗게 비어 있던 머릿속에 그 단어가 스친 순간, 삽시에 낯빛이 시퍼레진 크리스토프는 부들, 입술을 떨었다.
그제야 깨닫는다.
남자와 남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지, 자신의 몸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이 남자와, 리하르트 타르텐과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섹스를
했다는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만한 기력도, 정신력도 없었는데도, 꼼짝도 못하도록 단단히 크리스토프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남자가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소리를
아득하게 들으며, 크리스토프는 정신을 놓았다.
*
“……. 크리스토프?”
뭔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것 같아서, 정태의는 책에서 시선을 들어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잘못 들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정태의가 이 방에 들어왔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아처럼 몸을 구부리고 스스로를 끌어안으려는 듯 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해 모으고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태의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읽던 책으로 가만히 부채질을 하며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미열이 나고 몸이 안 좋다고 그래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딱히 크게 아파 보이진 않았다. 잠든 걸 확인하고서 살짝 이마를 짚어 보자 확실히 평소보다 약간 뜨거운 듯도 했지만,
그래도 평열에 가까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잠시 그 옆의 의자에 앉아 근처에 있던 책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펼쳤다. 조금만 그렇게 앉아 있다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크리스토프가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던 것은.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토프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잘못 들었나 보았다.
“…….”
정태의는 한 챕터를 다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듣도 보도 못한 철학서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참 곱게도 잠들어 있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 아래로는 제 성격만큼이나 말끔한 파자마를 깔끔하게 챙겨입고 있다. 목까지 단추를 꼭꼭 채우고서.
잘 때는 속옷만 입고 자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는 정태의였다. 예전에 한 번은 어느 몹시 피곤했던 날, 샤워하고 나와서 알몸 그대로 침대 위에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도리어 피로가 더 쌓여 다음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꼴을 당했던 뒤로는 아예 벗고 자지는 않게 되었지만.
지금도 좀 피곤하다 싶어서 아주 편하게 자고 싶을 때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자고 평소에도 그 위에 가벼운 옷 한 장 정도나 더 걸치고 자는 정태의는, 깨어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 때도 완벽한 드레스코드를 지키는 크리스토프를 매우 감탄스럽게 바라보았다.
“입 다물고 움직이지 않으니까 정말로 그냥 조각이네.”
정태의는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혼잣말했다.
이마며 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블론드며, 뺨 언저리만 약간 발그스름한 하얀 피부, 깎은 듯 곧은 콧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저 정도면 거의 완벽하다고…….
“……. 눈이 좀 부었나?”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보니 눈이 좀 부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고, 볼 때마다 한 군데 흠 잡을 데가 없는 눈매라고 생각했었으니 원래 부은 건 아니다. 지금만 약간 부은 것 같았다.
“별로 오래 자지도 않았을 텐데 뭘 눈이 다 부어…….”
정태의는 희한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정태의가 한참 동안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때였다.
어느 순간, 그 시선이 따갑기라도 했는지 꿈틀, 눈썹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 주름을 짓던 눈매가 펴지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올라간다.
그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팔 길이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정태의는 무릎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채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잠들어 있던 자세 그대로 눈만 뜬 크리스토프 역시
정태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깜빡, 깜빡,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귀를 잘 기울이면 기다란 속눈썹이 바스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 태이.”
불쑥, 정적을 깨며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정태의는 대답보다 먼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보니 눈만 부은 게 아니다. 목소리도 잔뜩 잠겼다. 누가 보면 한 스무 시간쯤 자다가 일어난 사람인 줄 알겠다.
“몸, 많이 안 좋아?”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많이 아픈 걸까 생각하며 정태의가 묻자, 크리스토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크리스토프는 도리어 살짝 낯을 찌푸리며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투로 반문했다.
갓 잠에서 깨어나면 늘 그렇듯 크리스토프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러나 꼼짝도 않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모습은 아직 잠에서 미처 덜 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쯤은 잠에 취해 꿈속에 젖어 있는 듯, 그렇게 몽롱하게 얼굴을 찌푸리고서 눈만 깜빡이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문득 물었다.
“계속 여기 있었어?”
“응? 어……, 한 30분 전부터?”
“……. 나 자는 동안 너…….”
갑자기 크리스토프의 고운 눈매가 사납게 가늘어졌다. 정태의는 공연히 움찔해서 몸을 약간 뒤로 물렸다.
얼굴 감상 하고 있던 걸 들켰나. 아니 하지만 그 정도는 뭐 어때서. 그냥 보기만 한 것뿐인데. 설마 관람료를 내라거나…….
“나 끌어안고 있었지.”
냉랭하게 흘러나온 말에 정태의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안 그랬어!!!”
생사람을 잡아도 엄청나게 잡는다.
거의 반사적으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고서 크리스토프에게서 조금 더 물러앉았다.
“첫째로, 끌어안으려면 일어나 있을 때 당당히 끌어안지 왜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끌어안아, 난 그런 비겁하고 음흉한 사람이 아냐! 둘째로, 나는 그런 취미는 없어! 너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은 추호도 없고, 설령 일레이가 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몰래 끌어안지는 않는다고!”
아니, 일레이라면 몰래 끌어안으려고 침대 위로 무릎 한쪽이라도 올리는 순간 눈을 뜨겠지만.
정태의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몹시 미심쩍은 얼굴로 정태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 그래?”
여전히 미심쩍게, 크리스토프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쪽으로도 한 번 갸웃거린다. 그걸 한 번 더 되풀이하고 나서야, 여전히 미심쩍으나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준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다고 치지.”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네게 손가락 하나 안 댔다니까! 남이랑 닿는 걸 치 떨며 싫어하는 네게 몰래 손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정태의는 속으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입 밖으로 외치기는 포기했다. 괜히 길게 말하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꿈이라도 꿨어?”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꿈? 하고 크리스토프는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흐릿하게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서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베개에 살짝 눌려서 볼록 튀어나오는 볼이 말랑말랑해 보인다.
폭 눌러보고 싶지만 이렇게 누명을 쓰고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 정태의는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억눌렀다.
“꿈이 아니라……, 분명히 누가 끌어안고 있었는데. 등 뒤에 달라붙어서 꼭 끌어안아서, 답답하고 기분 나빠서 몸부림을 쳤는데도 안 떨어져서, 일어나기만 하면 두고 보자고 이를
갈면서 잤는데…….“꿈이네.”
정태의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꿈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 적어도 두 가지는 나왔다.
일단 누가 끌어안고 있었다면 크리스토프의 성격에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끌어안기는커녕 슬쩍 몸을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 하나를 사단내고 말았을 거다. 아니 그 전에
크리스토프의 접촉기피를 모를 만한 사람이면, 이 방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단이 나고도 남았다.
게다가 백 번 양보해서 누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쳐도, 크리스토프가 나중에 두고 보자고 생각만 하고 그냥 잤을 리가 없다.
정태의가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그런가? 하고 그 근거에 납득을 하면서도 도통 미심쩍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감 있는 꿈이었어?”
“음……. 내가 지쳐서 자고 있는데 뒤에서 이렇게 끌어안고서, 낮게 숨 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단 말야. 어깨에 숨결도 닿았고. 간지럽고 선뜩해서 잔뜩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 그런데 왜 안 일어났어?”
“눈이 안 떠졌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는데.”
“아아. 그럼 그거 가위눌린 거네.”
정태의는 다시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 덜 미심쩍게, 크리스토프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가위?”
“그래. 눈도 안 떠지고 몸도 안 움직였다며.”
“응.”
“그게 가위야. 한 번도 눌린 적 없어? 난 가끔 피곤하면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크리스토프는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게 가위구나, 처음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얼굴이, 그제야 의심에서 풀려나 그럭저럭 납득하는 빛으로
돌아온다.
험악한 얼굴에서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크리스토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협탁 위의 시계를 본다. 그러다가 다시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시간에 나는 왜 자고 있었어?”
“응? ……아팠다던데. 리하르트의 말로는.”
“아파? 내가? 리하르트가 그래?”
크리스토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래서, 나더러 한 번 들여다보라고 하던데. 걱정하는 것 같더라.”
뒷말은 살짝 거짓말이다.
물론 말투 자체는 사뭇 걱정스러운 듯한 투였지만, 리하르트가 진지하게 크리스토프를 걱정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약간의 미열 정도로 걱정할 인물은 아니다.
정태의가 말하자 크리스토프 역시 어림도 없다는 듯 도끼눈을 뜬다.
“그놈이 걱정을 해? 흥. ……그런데 내가 왜 아파.”
크리스토프는 잘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기억이 살짝 비어 있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 같다. 아직 약간 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살짝 흐리긴 하다.
“……. 크리스. 아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손님들이랑 같이 차 마시다가, 네가 리하르트의 눈가에 호랑이연고를 발라서 둘이 같이 응접실에서 나갔잖아. ……그 뒤에 혹시
싸우기라도 해서 좀 다치거나 한 건 아냐?”
몰래 엿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기억을 일깨워줬다.
혹시 아직도 잠에서 덜 깼나. 이것도 꿈꾸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정태의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데,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으음, 하고 중얼거린다.
“호랑이연고……. 그래, 그랬지……. 그리고……어쨌지?”
역시나 잠에서 덜 깬 모양이었다크리스토프는 머리가 무거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천천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친 듯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이었다.
헤드쿠션에 몸을 기대어 앉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움찔했다.
눈에 띄게 몸을 움츠리며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덩달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아, 아래가…….”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파자마 아래로 더듬더듬 손을 넣었다. 깜짝 놀란 어린애처럼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면서 엉덩이 아래를 더듬거린다.
“왜?”
“아래가 좀 축축……. ……뭐가 흘러나오…….”
멍한 얼굴로 띄엄띄엄 말하던 크리스토프는,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무섭게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일시에 핏기가 싹 가시고 창백해지는 그 얼굴을, 정태의는 당혹스레 바라보았다.
“크리스……, 왜 그래.”
“…….”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침대 끝자락에 고정된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부들, 푸르스름한 입술이 떨렸다.
“크리스토프. ……크리스?”
정태의가 조심스럽게 다시 부르자,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유리 같은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싸늘하고 험악한 빛이 파랗게 담긴 눈이, 허공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듯 무시무시하게
노려본다.
“크리스.”
“……. 아무것도 아냐.”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낮게 억누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음색이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하게 얼어붙었던 얼굴에 서서히 붉은기가 돌았다. 그 붉은기는 얼굴만이 아니라 귀에서 목덜미까지 번져나갔다. 파자마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상반신까지, 아니 온몸이 다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았다.
이불 위에 넋 없이 놓여 있던 손은 어느새 이불을 틀어쥐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얗게 관절이 두드러진 주먹도 부들부들 떨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다.
정태의는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입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의아하게 몸을 사렸다.
“……. 정말 괜찮아?”
“괜찮아! 빌어먹을, 그냥, ……그냥 좀 젖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눈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러잖아도 눈이 약간 부어 있었는데 눈가까지 빨개지자, 꼭 울기라도 한 사람 같다. 아니 금세라도 울 것 같다는 편이 옳겠다.
“젖다니, ……. …….”
정태의는 아직도 파자마 아래쪽, 엉덩이 아래에 손을 넣은 채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침묵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최대한 귀엽게,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말을 골라 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어떤 단어를 쓰든 결국은 몹시 부끄러운 말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정태의는, 그나마 귀엽게
들릴 만한 단어로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 쉬야……?”
“아냐!!”
정태의가 머뭇머뭇 조그맣게 물어보자, 크리스토프는 당장 펄떡 뛸 기세로 외쳤다.
고개를 번쩍 들어 정태의를 노려보며 부르르 떠는 그 얼굴을 마주보자, 눈가가 더 빨개져 있었다. 저러다가 정말로 울겠다.
설마 그러지야 않겠지만 진짜 울기라도 하면 어쩐지 몹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를 것 같아서, 정태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농담이야, 농담.”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괜히 몸을 멀찍이 떨어뜨렸다한참 동안 말없이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불을 움켜쥔 주먹도 떨린다. 분에 겨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은 농담이라손 치더라도, 아래가 젖다니.
정태의는 아직도 뻣뻣이 굳어 엉덩이 아래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문득 천천히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 부근이 젖을 만한 원인이 하나 더 생각난 탓이다.
“…….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랑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목소리가 나왔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으면 오히려 그런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움칫하다가 부정도, 긍정도 않고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고도 언뜻 감정이 출렁이지 않았다.
그저 두통이 일었을 뿐이다. 매우 심하게.
정태의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세게 문지르다가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사나운 얼굴을 하고, 크리스토프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 …….”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라고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정태의의 난감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토프는 한참 동안 허공을 원수처럼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언짢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 어차피 그놈과 비역을 한 게 처음도 아니고. ……역시 용서할 수는 없지만. 죽여 버려야지, 리하르트 놈……!!”
피곤한 듯 중얼거리다가, 다시 분이 치솟은 듯 부르르 떨며 이를 가는 크리스토프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는, 매우 애매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갑자기 누가 가볍게 뒤통수라도 탁 친 것 같았다.
“어……. ……?”
저 입에서 나오는 ‘비역’이란 말이 어쩐지 참 낯익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비슷한 단어를 들었던 것 같다. 그 말 자체는 충격적이었으나 그 내용은 알고 보면 퍽 대수롭잖았던.
정태의는 눈만 껌벅거리며,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이 새끼를 어떻게 죽이지.”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때랑 비슷한 건가. 알고 보면 살짝 스친 거라든가. ……아니, 하지만 젖었다고 했는데. 거기가 젖을 만한 일이면…….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와 같은 효과인지 저 입에서 비역이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사태가 몹시
가볍게 느껴졌다.
아니, 따지고 보면 아래를 건드리기만 한 거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충분히 심각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악의 사태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볍다.
게다가 설령 정말로 최악의 사태라 해도…….
“……. 왜?”
정태의의 지긋한 시선을 느꼈는지, 분노로 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 더러운 걸 그 더러운 데에…….”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구역질이라도 나는 듯 입을 누르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흘끔 노려보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그 더러운 걸 그 더러운 데…….
갑자기 상황이 파악될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지금은 더 이상 두통거리를 늘리지 말고 나중에 생각하자고 마음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젓다가 보니 어느새 자신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움찔, 문득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그제야 깨닫고, 정태의는 의식적으로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면서
알아차린다.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이런이런…….”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펼치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른 사람의 일에 화를 내도 좋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또한, 화를 내며 끼어들어도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이 집에서 나가기 전에, 그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 버리고 나간다.”
이를 갈며 혼잣말로 다짐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정태의는 마지막으로 굽어져 있던 새끼손가락을 폈다.
“……. 크리스. 괜찮아?”
정태의가 조용히 묻자 크리스토프는 험한 얼굴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안 괜찮아. 굉장히, ……굉장히 기분 나빴어. 토할 것 같았는데 토하지도 못했어. 아주, 아주 끔찍했단 말야. 소름이……, ……으우……, ……. …―말해 두는데 너, 예전처럼 내가
그놈 죽이려 할 때 끼어들지 마. 괜히 말리겠다고 끼어들면 정말로 너부터 치워 버릴 테니까.”
정태의는 몇 초쯤 아무 말 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리는지 입가와 가슴께를 움켜쥐면서도 험악하게 말을 마친 크리스토프는 왜 대답을 안 하냐는 듯 눈을
부라리며 눈짓했다정태의는 문득 웃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럼 됐고. ……걱정 마. 절대로 방해 안 할 테니까.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법정에서 증언해 줄 수도 있어.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러자 잠시 입을 다문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얼굴을 이상하게 찌푸리더니 픽 웃었다. 그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표정을 굳혔다.
“……몸을 씻어야겠어. 더러워.”
불쾌함이 마디마디 서린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나가려고 발을 내디딘 순간 힘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지만.
“괜찮아?!”
“괜, ……. ……으윽, 또 흘러나…….”
크리스토프는 침대에 엎드린 채 새파란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정태의는 옆에서 부축을 할 듯 말 듯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몸에 손을 대면 싫어할 테고, 지금 혼자서 일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씻고 잠든 것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잠들었던 차림새가 아주 말끔했었다. 지금도, 움직이는 통에 약간 주름이 지긴 했지만 옷장에서 새로 꺼낸 듯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 아닌데?”
그러고 보니……, 하고 미심쩍게 대답하며,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럼 뭐……, ……그런가 보지.”
정태의는 말을 얼버무렸다. 크리스토프도 몹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다.
이 상황을 설명해 줄 가설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 가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어 말하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토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몇 번이나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넘어졌다를 반복하던 크리스토프는―정태의가 보다 못해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잠시 그 손을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누구든 건드릴 기분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죽여 버려야지, 죽여 버려야지, 혀끝으로 칼을 갈며 겨우 욕실에 이르렀다.
문턱 위에 버티고 서서 파자마 단추를 풀던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여전히 기분은 개운치 않았지만 크리스토프도 귀찮아하는 눈치라서 그만 방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정태의는, 가만히 멈춰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의아하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손으로 몸을 닦고 파자마를 입은 기억이 없어.”
“어…….”
정태의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모른 척 넘어가려던 화제가 결국 다시 튀어나오고 말았다.
물론 정태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렇게 말끔하게 파자마를 다 챙겨입고 잠들어 있던 크리스토프가 반쯤 잠에 취해 얼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리하르트에게 모종의 험한 일을 겪은 크리스토프가 곧바로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몽롱하게 잠들었다면. 그런데도 몸도 말끔하고 옷도 깨끗하게 갖춰 입고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야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다. 다만, 그 결론이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러나 그 현실적이지 않은 결론을, 잠시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었다.
“리하르트, 그놈밖에 없어. 파자마를 입혀서 나를 침대에 눕혀 둘 사람은.”
“……. 그렇지……, 현실적으로.”
차라리 정태의가 그 가설을 믿으면 믿었지 크리스토프만은 절대로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토프가 먼저 진지하게 그 말을 했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 양심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일단은 좋게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선행―과연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가능성을 먼저 말했다는 게 놀라웠다크리스토프라면, 설령 모든 상황이 리하르트가 정신을 잃은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침대에 눕혀 줬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차라리 자신이
몽유병에 걸렸다고 주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토프는 파자마의 단추를 풀다 말고 한참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새를 보았다.
깨끗하게 빨아 놓은 빳빳하고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몸도 말끔하게 닦아 주었는지 끈적거리거나 미끈거리지도 않았다.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리하르트가…….”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응? 하고 반문한다. 심장이 두근, 뛰었다.
비록 자신에게 극악무도한 짓을 했더라도, 사소한 선행은 인정해 줄 마음이라도 든 걸까.
크리스토프가 새삼스럽게 보여 정태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조금 더 고민하는 눈치이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네소스의 피를 구했나?”
아주 그럴 듯한 가설을 세웠다는 듯 진지하게 눈을 반짝이며 정태의의 의견을 구하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 혹시 그 옷이 네 피부에 달라붙어 안 떨어져?”
“아니…….”
“아니면 그 옷을 통해서 뭔가 타는 듯한 통증이라도 느껴진다든가?”
“아닌데.”
“그럼 아니겠지.”
“…….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얼굴을 찌푸린 채 크리스토프는 욕실로 들어갔다.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리하르트를 악독하게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에 감동에 가까운 감탄을 느끼며―그야 이 상황은 악독하게 바라보아 마땅한 상황이긴
했지만―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직 나도 사람 보는 눈을 기르려면 한참 멀었구나. 그러고 보니 처음에 리하르트가 베를린으로 찾아왔던 때에도, 그를 두고 인상이 좋다고 했다가 일레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었지.
“…….”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묵직한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렸다.
방으로 돌아가면 씻지도 말고 바로 침대에 뻗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크리스토프의 방에서 나갔다.
***
어디선가 숨어서 보고 있다가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정태의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뚜르륵, 뚜르륵, 짧고 빠르게 울리는 이 소리는 내선이다.
어, 하고 잠시 멈칫한 정태의는 성큼성큼 걸어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받자마자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짧은 침묵이 돌아왔다. 그제야 아, 혹시 다른 사람인가,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저택 안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극소수다. 그리고 그 극소수 중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몇 분 전에 욕실에 들어가 지금은 몸을 박박 닦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 여보세요?”
앞말을 만회하려는 듯 다시 조심스럽게 정태의가 응답하자,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친구 하나 못 만들었나 보지. 전화할 사람이 당연히 나라고 여기는 걸 보니.」
“뭐야, 역시 맞잖아.”
역시나 일레이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곤 소파에 푹신하게 몸을 묻었다. 이대로 잠들면 딱 좋을 것 같다.
“그러잖아도 네 방에 갔다 올까 했는데.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전화 속에선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 이유는 없었다. 크리스토프의 방에서 나와 걸음을 떼는데,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레이에게 들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원래 정신이 너덜너덜하게 지치면 가끔
뜬금없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그러나 중앙계단으로 슬슬 걸어가다가 계단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이렇듯 지친 몸과 마음으로 가기엔 그의 방이 있는 동익은 너무 멀리 있었다.
역시 관두자. 마땅히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수 없으면 더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정태의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다시 걸음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때.」
어울리지 않게 남의 안부를 묻는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정태의는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눈매가 험해진다.
“그러고 보니 너, 알고 있었지.”
「뭘.」
“리하르트가 그 녀석 건드렸다는 거. 뻔히 다 들렸을 것 아냐.”
「음? 아아.」
모르는 척,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얄밉다.
그러나 애꿎은 전화기를 노려보던 정태의는 이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미리 알았다 한들 뭘 할 수 있었을까. 도중에 들이닥쳐 당장 말릴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종합적으로
보아 별로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거다.
「늘 마주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녀석들이었으니, 올 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그런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정태의는 아까부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세게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거나 몸을 못 움직이지는 않지?」
“어, 좀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깨어나서 멀쩡히 걸어다녀. ……아니 그게 아니라.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보는데.”
「이 상황을 리하르트나 크리스토프가 어떻게 써먹느냐 하는 정치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말하는 문제는 심적인 충격과 부담, 그것 아닌가.」
“어, 그렇지.”
「그러면 몇 시간 전과 상황이 달라진 게 뭐가 있어. 이미 비역질을 하고 난 관계라고 생각했던 녀석인데 걱정할 건 뭐가 있고. ‘비역질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다른 거라곤 몸의 부담뿐일 텐데.」
“…….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딘가 궤변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프를 떠올려 본 정태의는, 리하르트를 죽여 버리겠다고 부들부들 떨긴 했지만 좀 더
부정적인 쪽의 심리 상태에 빠지지는 않은 듯이 보였던 걸 생각하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딴에는 그렇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야.”
「목소리나 들어 보고 싶어서.」
“……. 너 누구야.”
정태의는 제법 진지한 마음으로 되물었지만 저쪽에서는 농담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방에 무사히 돌아갔나 싶어서 전화해 봤어.」
정태의는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다시 한번 해 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위험한 밤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저택 안에서만 움직였는데 방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정태의가 묘령의 연약한 여자도 아닌데 그런
안부전화씩이나 할 필요는 또 어디에 있을까.
“방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게 뭐가 있어. 집에 부비트랩이 설치된 것도 아니고.”
「너는 걱정이란 말야, 정태이. 모르는 사람이 사탕 주겠다고 하는데 졸랑졸랑 따라갈 것 같아서.」
“안 그래!”
정태의는 진지하게 부정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 근 30년 전, 아직 정태의가 철모르던 그 시절에.
그러나 정태의는 따라가지 않았다. 사탕 따위는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뭔가를 선물받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가지 않았던 이유가 일반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어쨌든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 속의 목소리는 피식 코웃음쳤다「그냥 준다고 하면 따라가지 않겠지. 하지만 예를 들어 네 친구 ××에게 전해 주고 싶은 사탕이 저쪽에 있는데 잠깐 따라와 볼래, 그러면 따라갈 거잖아.」
“…….”
그런 적도 있었다.
웬 남자가 형에게 주고 싶은 귀한 책이 있다고 해서, 형이라면 책을 좋아하니까 기뻐할 것 같아서 졸랑졸랑 따라갔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우연히 옆집 아줌마를 만나서 도움을
받았지만.
“너 내 뒷조사했어?”
정태의가 미심쩍게 묻자 이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정태의는 아차하고 만다. 그저 입이 방정이다.
「태이……, ……. ……. 진짜로 걱정하게 만들지 마라.」
이 남자의 목소리도 아주 조금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목소리를 다 듣다니, 그래도 입방정의 보람이 조금은 있다.
정태의는 픽 웃었다.
이런 부분이다. 자신이 여전히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이유는.
“사실 따지고 보면 진짜로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인데 말이지…….”
「나?」
의외라는 투의 대꾸가 날아온다. 하긴 이 남자가 누구에게서 걱정된다는 말을 들어나 봤을까.
“그렇잖아. 어디서 대테러 특수부대에게 잡혀가지는 않았을까, 어디서 원한을 품은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을까, 집 비우고 일 나가서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하다가 폭탄이라도 한 방 맞지나 않을까.”
말하고 보니 모두 몹시 가능성이 크면서도 또한 별 가능성이 없을 듯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피로하고 나른한 밤에는 실없는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그 상대가 일레이인 것도 좋다. 저 너머에서도 웃는 기척이 들려 더욱 좋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와 이렇게 실없이 전화로 대화를 한 게 얼마만일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정태의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는데, 전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왔군……. 이만 끊어야겠다.」
“어, ……어?”
노크 소리는 자신의 방문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하고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성가시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밤중에 귀찮게 구는군. 그래, 그럼 좋은 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태의는 수화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노크 소리까지 그렇게 또렷하게 전해 줄 만큼 이 전화기의 성능이 좋을 리는 없고…….
그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정태의의 방문이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군.
정태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 시간에 자신의 방으로 찾아올 만한 극소수의 사람을 떠올리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대뜸 반말로 맞이한 정태의의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얀 토베와 구트라만으로도 그 자리에 위화감을 주는 남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귀빈이 거기에 서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친구가 온 줄 알고.”
정태의는 당황해서 사과를 하며 문 앞에서 비켜섰다.
말리크와 함께 온 남자였다. 이름이……, 아까 들었는데 뭐였더라……. 이름을 다시 물어보면 엄청나게 실례겠지.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굴리는 정태의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온 남자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정태의도 그가 앉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남자는 잠시 정태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뭔가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정태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카림 아지즈입니다.”
“아, 예. ……정태의입니다.”
이름을 가르쳐줘서 다행이었지만, 혹시 이름을 까먹은 게 얼굴에 티가 났던 걸까 살짝 고민하는 정태의였다.
“정재의 씨와 많이 닮으셨군요.”
아지즈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에 정태의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 아, 예,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렇습니까? 별로 닮지 않은 형제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보면 곧 형제라는 걸 알겠는걸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는 아지즈의 말은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정태의는 자신이 생각해도 별로 닮지 않은 형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만난 적이 있으신가 보죠.”
그에게 화제를 맞추면서,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를 찾아갔을 손님을 생각한다.
……아하.
이유를 아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현상 자체를 짐작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짐작한 뒤 이유를 짚어내는 게 복잡할 따름이다.
“정재의 씨와는 몇 년 전에 한 번 만나 뵈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지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리크와는 달리 그다지 웃음이 없는 그는 말투도 사뭇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적어도 이쪽까지 함께 사교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별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늘 조용히 있다가 뭔가 생각이 떠올랐을 때에야 불쑥 중얼거리는 형을 생각하며 정태의가 쓴웃음을 짓자, 아지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식견이 탁월해, 시간이 더 지나도 이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겠구나 감탄했었지요.”
몇 년만 더 지나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할 듯한 아지즈는 조용히 말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정태의는 공연히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내심 한숨을 쉰다. 앞으로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이 보인 탓이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때에는 오래 끌어서 좋을 바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었다.
“형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벌써 몇 년이나 형과는 만나지 못해서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하던 참이라, 오랜만에 형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네요. 어릴 때는 그래도 같이
지냈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이제는 만날 일도 뜸해지고 각자의 생활이 생겨, 타인과 별 다를 바가 없어졌거든요.”
물론 형을 좋아하는 건 여전합니다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아지즈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바보가 아니다. 정태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말리크 같은 남자라면 태연하게 웃으며 짐짓 못 알아들은 척 이야기를 꺼내겠지만, 이 남자라면
그러지 않을 거다.
역시나, 아지즈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약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태의는 지금쯤 일레이의 앞에 앉아 있을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인선이다. 그런 구렁이과의 사람은 일레이에게 보내는 게 옳다. ……그러나 과연 그쪽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최종적인 목적은 같다 하더라도 제시하는 이야기는
같을 리 없을 텐데.
정태의가 흘끔 전화를 쳐다보는데, 아지즈는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태의 씨.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어떻게든 정재의 씨를 모셔서 도움을 얻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여태 수차례 정재의 씨께 연락을 드려봤습니다만, 정재의 씨가 몸담고 있는
기구 측에서 탐탁지 않아 해서 연락이 좀처럼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정재의 씨께도 연락을 주십사 말씀드렸는데 마땅히 답변을 주지 않고 계시더군요.”
“아…….”
그건 아마 형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까먹었을 가능성이 커요, 라고 말하려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의 추이를 짐작컨대, 그렇게 말해서 좋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정재의에게 뭔가 답변을 들어내려면, 생각한 뒤에 연락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굴리느라 바쁜 그는 그런 류의 청원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답변을 주겠노라고 확실하게 약속을 받아냈다면 모를까, 단순히 연락을 달라는 청만 해서는 답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연락이 된
시점에서 바로 답변을 받아내거나, 혹은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면 형만 귀찮아질 게 뻔……, ……, 가만있자, 그러면 나는 편해지겠구나.
정태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아지즈를 향해 빙긋 웃음 지었다. 형아 미안“형은 원래 뭔가 하나에 집중을 하면 다른 건 잘 돌아보지 않아요. 특히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 같은 약속은 더 그렇죠. 그러니까 연락이 닿았을 때 바로 답변을 받으시거나,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가 힘들다면 답을 받아낼 때까지 그쪽에서 계속 연락을 해야 해요.”
정태의가 말하자 아지즈는 눈을 크게 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감탄이 서린다.
“자, 그러면 모쪼록 다시 연락해 보시고, 좋은 결과 얻으시길.”
정태의는 짐을 던 기분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가야 할―혹은 상관에게 그렇게 보고해야 할―이 남자는 다시 고개를 약간 숙이며 생각에 잠긴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정태의의 앞에서 제법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혹여 정재의 씨가 답변을 주시지 않는 이유가 예전의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안 좋은 일이요?”
아지즈의 말을 되풀이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안 좋은 일이라면 어떤……, 하고 물으려는데 아지즈가 먼저 입을 연다.
“정태의 씨도 아시다시피 과거에 정재의 씨를 휴양지의 별저에 모신 적이 있는데, 그때 혹여 정재의 씨가 마음 상하신 바가 있어 저희 측과 연락하길 피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휴양지의 별저라면 정태의도 알고 있었다. 정태의도 덩달아 그곳에 같이 갇혀서 지내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결국 지금 이 꼴이 되지 않았던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태의가 모르는 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때 형이 마음 상한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형은 그 조용하고 평온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머무르고 있었다. 만일 정태의가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거기서 그렇게 있었을지도 몰랐다.
굳이 마음 상할 일이 있다면 오히려 정태의가 있었다. 그 별저의 주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정태의를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정재의에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했다. 심지어는 정재의의 앞에서는 정태의에게도 예의를 지킬 정도였다.
정태의는, 딱 잘라 말하자면 그 남자를 싫어했다.
굳이 그 남자 역시 자신을 싫어했다는 점을 빼고 보더라도, 생각해 보면 설계도면을 주면 내보내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아.
“맞다……, 하긴 형은 약속을 깨는 건 싫어하지요.”
정태의는 막연하게 과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면서 따지고 드는 성격은 결코 아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태의의 말에 아지즈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태의 씨께서 도와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정태의는 움찔, 과거를 더듬던 기억에서 벗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하긴 앞서 늘어놓은 말의 순서를 보자면 당연히 나올 말이기는 했지만.
“제가요…….”
정태의는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난처할 것도 없고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여태 정태의에게 그런 식의 청원을 넣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태의는 거절했다.
아마도 정태의가 부탁한다면, 정재의는 어지간한 일은 들어줄 거다. 정재의가 부탁하는 일은 정태의 역시 거의 다 들어주리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정태의와
정재의,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태의는 타인의 바람을 정재의에게 대신 전해주지 않았다. 그 바람이 정재의에게 과연 좋은 것인지, 정재의가 바라는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태의 독단으로 판단을 해 봐도 정재의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그에게 말을 전해 주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안 좋은 일일 수 있다는 생각 쪽이 더 컸다. 무엇보다도 정재의를 불러들이려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남자 아닌가. 정태의가 개인적으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 인물,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절대로 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말이죠……, 형에게 그런 말씀을 전해 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첫마디부터 거짓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뒷말은 진실이다.
정태의는 난감하게 입매를 찡그리며 아지즈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딱 잘라 거절했을 테지만, 그 점이 문제였다. 아지즈의 뒤에 있는 자가 라만, 더 나아가서는 타르텐에게 차관을 제공한 회사라는 것이.
그의 개인 별저를 폭삭 무너뜨리고 심지어 그 나라 수도까지 폭격한 바에야, 아무래도 입장이 약하다. 너무 약하다.
하지만 그래도 거절할 수밖에 없다정태의는 비록 자신의 얼굴이 몹시 두꺼워진다 하더라도, 정재의가 군수에 관련되길 원치 않았고 또한 권력 암투가 몰아치는 정치판에 말려들길 바라지 않았다.
“물론 저희도 그냥 부탁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지즈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긴 ‘거절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도 여태 거의 없었다.
“정재의 씨에게는 저희 측에 머무르시는 동안 최상의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누릴 수 있는 호사로만 말씀드리면 직계 왕족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도록 해 드리겠다고, 제
상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접하는 데에는 절대로 허술함이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보상 역시 결코 부족하다 여기시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해 드릴 예정입니다. 또한――.”
아지즈는 그 뒤로도 안전이나 안정, 편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상세한 금액을 말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글 돌 것 같았다.
정재의에게 제공될 것에 대한 설명을 마친 아지즈는, 짧게 덧붙였다.
“정태의 씨 역시, 도와주신다면 결코 섭섭하게 대접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태의는 귓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갑자기 현실감이 떨어져서, 아, 예, 하고 피곤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피곤하다. 오늘 잠들면 내일은 못 일어날지도 몰라.
“말씀하시는 바는 감사합니다만, 역시 어렵겠습니다.”
이 피로를 더 오래 끌었다가는 내일뿐 아니라 모레도, 글피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정태의는 딱 잘라 말했다.
“저는 형에게 어떠한 청탁을 넣는 데에 도움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정태의의 형인 정재의와는 잘 알고 지냅니다만, 그러한
청탁을 받는 천재적인 연구 개발자인 정재의와는 친하지 않습니다.”
정태의는 단호하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이 화제를 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뜻을, 깍지 낀 손과 의자에 곧게 기댄 자세로 말없이 전달한다.
아지즈는 다시 약간 고개를 숙였다.
거절을 하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라, 그대로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은 침중해져 있었다.
아지즈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조금 전과 같이 담담하나 보다 단호해진 말투로 말한다.
“가능하다면 승낙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저는 타르텐에 손님으로 와 계신 정태의 씨를 찾아왔습니다만, 곧 타르텐이 저희 쪽에서 빌려간 차관을 변제하게 되면 다시 뵙게
될 때 다소 입장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어떠실지요.”
협박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렴풋이 안타까운 듯, 권유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본론이었다.
정태의는 원치 않게 테러범이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뒤,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정태의가 간결하게 대답하자, 잠시 동안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던 아지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 그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재의 씨에게는 신세를 진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분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도움을 받았던 바,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재의
씨의 동생분에게도 나쁜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호의로 대하는 자에게는 호의를 보이시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용서 없이 냉혹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정태의 씨가 이번에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도와주신다면, 정태의 씨에게 퍽 다행한 일이 될 터입니다.”
아지즈는 조용히 말을 마쳤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순수한 호의로 정태의에게 해 주는 충고였다.
그러나 정태의는 고맙게 여기면서도, 결국 다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지즈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패션:다이아포닉 심포니아 1. Arabian business(2)
***
“밑져야 본전이니 찔러나 보자, 그거잖아.”
크리스토프가 대뜸 중얼거린 말이었다.
정태의는 커튼을 묶다가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눈부시도록 밝게 들어와 침대 발치까지 닿았다.
“아니 뭐……, 그렇게 약삭빠른 투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말투가 어쨌든, 내용은 그거잖아.”
오늘 아침 크리스토프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원래부터 아침에는 기분이 안 좋은 남자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하다. 오히려 어제는 그럭저럭 걸어다닐 수 있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허리 아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눈치였다덕분에 정태의는 근육통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의 신경질을 다 뒤집어쓰고 있는 참이었다.
“흥……, 널 설득해서 정재이를 끌어들이고 나면 최종적인 목적은 이루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는 다른 변제 조건을 내세우겠다는 소리잖아. 원하던 정재이도 손에 넣고,
우리한테는 변제도 따로 받아가고. 그렇게 되면 그놈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지. 거절 잘 했어.”
“어…….”
그야 거절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이제 정태의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게 확정된 셈이다.
그러나 매우 경쾌하게 거절 잘 했다고 외치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차관 변제의 실권자는 알 파이살이라면서. 라만의 후견인이라고는 들었지만, 라만과 그렇게 사이가 각별한가 보지.”
정태의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자, 끙끙거리며 간신히 엎드리는 데에 성공한 크리스토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알 파이살이 라만에게 지금은 전권을 양도했을걸. 원래 그는 아들이 없어서 라만이 거의 그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알 파이살은 일선에서 물러서서 한가하게 텃밭이나
가꾸며 살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흥, 젊을 때는 그렇게 공격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 남의 회사를 잡아먹으면서 사업체를 키운 양반이 늘그막에 평화롭게 지내는 걸 보면
세상이 그리 공평하지는 않아.”
말의 전반부는 정태의에게 알려주는 말로 듣겠는데, 후반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연한 짜증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놈이 어떤 신경질을 부려도 다 이해해야지. 아무렴. 지금 저놈이 몸과 마음 모두 얼마나 힘들지 나는 잘 알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빌어먹을, 일어나자마자 그놈부터 요절을 내러 가려고, 어젯밤엔 꿈까지 꿨었는데.”
몸을 뒤척이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린 크리스토프는 다시 서슬 퍼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평소에 백중세인 걸 감안하면, 그러잖아도 다친 데다 몸이 멀쩡하지도 않은 그 상태로 리하르트에게 들이닥치면 십중팔구는 네가 불리할 텐데.”
“내가 왜 불리해!”
“움직일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 보시든가.”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분한 듯 크리스토프가 도끼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넌 누구 편이야.”
“……. 난 이제 누구 편을 잘못 들기라도 하면 일레이한테 죽어…….”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약간 소리를 낮추어 묻는다.
“너는 일레이가 좋지?”
창문의 걸쇠를 풀던 정태의는 손을 멈추었다. 조그맣게 들려온 그 목소리를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본다.
크리스토프는 침대에 엎드린 채 팔에 턱을 묻고 있었다. 베갯잇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 어.”
말하려니 좀 쑥스럽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고, 게다가 당사자가 없으니 그래도 말하기 쉽다.
그래……, 하고 크리스토프는 말을 흐렸다. 정태의는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창문의 걸쇠를 풀었다. 살짝 녹이 슬었는지 뻑뻑해서 잘 풀리지 않았다.
기익, 기익, 귀에 거슬리는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풀려난 걸쇠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창문을 열었을 때,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온다.
“너는 나한테는 안 올 거지.”
정태의는 창문을 열고서 바깥을 내다보는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 돌아본다.
“어, 뭐라고?”
“……. 아냐.”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엎드린 채로 이불을 슬슬 끌어당겨 어깨까지 덮어 버린다.
정태의는 말없이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오전 나절의 맑고 아련한 소음이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렇다면 안 되는 건 빨리 깨닫는 편이 낫다.
약간은 씁쓸한 마음으로 넋 없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자니, 볼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이 바삐 나서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 없어?”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저 몸으로 오늘 일을 하라고 하면 지나치게 가혹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크리스토프의 시간이 오롯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물어보았다정태의가 묻자 대번에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치켜올라갔다.
“알 게 뭐야.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아……, 그렇지…….”
하긴 몸 상태가 저런데, 하물며 저 꼴로 만든 인간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면 그만큼 비참한 일도 없겠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리하르트도 인간이라면 지금 너더러 일하라고 내몰지는 않겠…….”
――똑똑.
정태의가 입을 열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입을 다물고 있는 정태의와, 귀찮은 듯 문 쪽으로 눈동자만 흘끔 돌리고 대답도 하지 않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그 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열렸다.
“오늘의 일정이 열 시 반부터 있다고 어제 말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리하르트였다.
그의 시선이 흘끔 향하는 곳을 따라 벽시계를 쳐다보자 시계는 정확히 10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에 따르려면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각이다.
들어오자마자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준 리하르트는 뒤이어 창가에 서 있는 정태의를 보곤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기 계셨군요.”
“예, 뭐.”
정태의는 반 토막으로 말을 잘랐다. 당장 이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는
서슬 퍼런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하르트……!”
여태 부루퉁하게 가끔 신음 소리만 흘려내던 목소리가, 한 톤 나직하게 들떠 흘러나왔다.
“너…….”
크리스토프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움찔 낯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멈추긴 했지만, 그래도 느리게나마 간신히 일어나 앉는다. 그 몸이 가늘게 떨리는 이유는 비단 아픔만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무슨 낯으로 이 방에 뻔뻔하게……!”
입술이 파랗게 질려 떨렸다.
금세라도 달려들어 그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듯 시트를 움켜쥔 손이 가끔 움칫거리며 움직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못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일어서서 침대 밖으로 한 걸음 나오기만 하면 쉽게 손 닿을 만한 거리에 서서 차갑게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정태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토프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너랑 할 얘기 따위 없어!”
크리스토프가 벌컥 외치다가 목이 바싹 말라 갈라졌는지 몇 번인가 마른기침을 한다. 그런 크리스토프에게는 잠깐만 시선을 떨어뜨렸을 뿐, 리하르트는 여전히 정태의에게
눈짓으로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자리를 비켜 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정태의였다. 심지어 그런 일이 있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강간범과 피해자가 조우한 상황에서, 강간범이 나가 있으라고 한다고 얌전히 나간다면 그건 범죄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절대 그렇게는 못하지.
“게다가 이곳은 크리스토프의 방이기도 하니, 크리스토프가 나가 달라고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나가고 싶지 않군요.”
정태의가 덧붙여 말하자 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늘 그렇듯 희미한 웃음이 담겨 있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좋으실 대로. 다소 듣기 거북한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나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하게 말을 한 리하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정태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예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크리스토프만을 보고 있었다. 마른기침을 하며 목을 감싸쥐고서도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만을.
“힘들어서 쉬고 싶나?”
그는 문득 부드럽게 물었다. 입가에, 눈매에, 서늘하게나마 웃음이 떠오른다. 크리스토프는 나직이 대꾸했다“…―이 정도 힘든 걸로 쉬고 싶을 만큼 약하게 생겨먹었더라면 여태 살아 있지도 못했어.”
“그래, 그럼 지금 바로 일어나. 오늘은 둘러봐야 할 일정이 많아.”
“……. 너랑 오늘 하루 종일 일정을 함께 한다면, 내가 미친 거겠지.”
잠시 어이없이 리하르트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험악하게 대꾸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를, 억지로 질질 끌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침대 기둥을 붙들고 일어났다.
이마에 언뜻 식은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두 다리로 서서, 더 이상은 약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리하르트의 앞에 마주선다.
“나는 너와 같이 다니지 않아. 이 변태 새끼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처럼, 침대 기둥을 짚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저 손에 칼 한 자루만 쥐어져 있다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 남자에게 달려들어서 그에게 칼을 꽂아
넣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이 태연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문득 웃는다.
“즉 쉬고 싶다는 거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간호라도 받으면서 같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지.”
그 말과 함께 흘끔, 창가에 팔짱 끼고 기대어 서 있던 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그 시선이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야 눈을 깜박였다.
아니 거기서 왜 날 봐?! ……영 잘못 짚진 않았다만.
“크리스토프. 너는 나와 함께 다녀야 해. 애초에 승계가 결정날 때까지 나와 함께 다니며 내 일을 돕는다고 했었지.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걷기 힘들다면 휠체어라도 준비해
주지.”
“……하. 휠체어는 네가 밀어 주려고?”
“그 정도는 해 주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몸으로는 힘들 테니.”
리하르트의 눈에 비웃음과도 닮은 웃음이 서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크리스토프에게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사뭇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속살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꿰뚫린 아랫도리가 욱신거려서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는 모양이지. 내 허리를 감아서 조일 때는 다리에 힘이 아주 세던데.”
“……!!”
그때였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가 불시에 침대기둥을 떨치며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한 걸음 앞, 몸을 기울여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닿을 수 있는 그 거리에 있는 리하르트에게 세차게 달려들어 부딪쳐,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침대 옆에 있던 티테이블이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퍼졌다. 찻잔이며 찻주전자가 깨어진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지는 두 사람의 소리가
겹쳐졌다.
“리하르트, 너는, 넌, 죽어 버려……!!”
바닥에 드러누운 리하르트의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크리스토프는 그의 목을 졸랐다.
원래부터 빛깔이 하얀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새파란 눈동자가 리하르트를 내려다본다. 그의 목을 감고 짓누르는 섬세한 손에는 뼈와
관절의 모양이 살짝 불거져 있었다.
“크리스……!”
저도 모르게 창가에서 떨어져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정태의는,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크리스토프가 아니라 오히려 리하르트가 정태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끼어들지 말고 거기서 보고만 있으라고, 이 자리에서 너는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태의가 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하자 리하르트는 다시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숨통을 짓누르는 손이 역시 괴롭긴 한지 설핏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움직였다.
리하르트의 손은 처음에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를 떨어뜨리려는 듯 약간 힘을 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에 더욱 세게 힘을 준다.
곧 리하르트는 포기한 듯 크리스토프에게서 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 손을 크리스토프의 허리로 옮겼다.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린 뒤 그 손이 파자마 속으로 파고들자, 크리스토프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반쯤 이성을 잃은 듯 살의만 번들거리던 눈에 불쾌한 빛이 섞였다. 약간 움츠린
손은, 그러나 여전히 리하르트의 목을 조른다.
괴로운 듯 얼굴을 약간 찌푸린 채로, 리하르트는 거침없이 크리스토프의 허리에서 바지 아래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파자마 바지가 내려가며 반쯤 드러난 엉덩이를 그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어느 순간 억세게 움켜쥔다.
“……!!”
크리스토프는 낯빛이 굳었다. 그리곤 초조하게, 리하르트의 목을 더욱 세게 틀어쥔다. 어서, 어서 죽어 버리라는 듯리하르트는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 손은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라는 것을 찾는 것처럼, 침착하게.
숨통이 막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서도, 리하르트는 언뜻 웃는 듯했다. 그 표정에,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의아한 빛을 띠면서도 한층 더 험해진다.
그러나 몇 초쯤 지났을까.
“크리……!”
“……!!”
옆에서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정태의가 저도 모르게 낯빛을 굳힌 것과, 크리스토프가 눈을 홉뜨며 한껏 몸을 움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느새 한 손으로 자신의 바지 퍼스너 사이에서 성기를 꺼낸 리하르트는, 다른 손으로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밀어 엉덩이 사이에 그 살덩이를 가져다 대었던 것이다.
몸속으로 통하는 입구 끝에 귀두가 맞닿자마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거기로 자신의 물건을 밀어넣었다.
푸욱, 전혀 대비도 않고 예상도 못하고 있었던 크리스토프의 몸속으로 그 불룩한 끄트머리만 파고들어 자리잡았다.
동시에.
경악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던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리하르트의 목을 풀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미친 듯이.
“크리스…―.”
반사적으로 그를 말리려던 정태의는, 두어 걸음 더 다가서다가 멈추었다.
말려야 하는 건지 혹은 도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끝부분 약간이나마 크리스토프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있는 거뭇한 성기가, 그 자세가 고스란히 보이는 상황에서, 정태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자신을 부르는 정태의의 짤막한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는지 크리스토프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본다.
당혹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토프는 일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어……, 크리…….”
정태의가 멋쩍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낯빛을 바꾸며 무섭게 고함을 쳤다.
“나가! 거기 있지 말고, 어서 나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문을 가리키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를 보고 크리스토프는 더더욱 길길이 뛴다.
“어서 나가라니까! 여기서 나가 버려!! 빨리 나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시퍼렇게 고함을 지르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그곳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정태의는 불안스럽게 그들을 쳐다보며 망설였지만, 창백한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그가 걸음을 늦추자 다시 나가라고 고함을 지른다.
불안스런 한숨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정태의가 나간 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크리스토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 곤란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숨소리가 불안정했다.
“좋아하는 놈 앞에서는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나 보지. 어떻게 하나, 크리스토프 타르텐. 저자가 서 있던 위치에서는 다 보였을 텐데. 꿰뚫려서 잔뜩 벌어진 구멍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크리스토프의 아래에서 느릿하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토프는 핏기 없는 얼굴을 그대로 떨어뜨려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시선으로 난도질이라도 할 듯이.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일부러, 이런……!!”
크리스토프는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사이로 살짝 파고들어 있던 물건이 입구를 문지르며 빠져나갔다.
그 느낌에 몸서리치며, 크리스토프는 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더 이상은 맞지 않았다. 그 주먹을 붙잡고, 다른 주먹까지 붙잡아 그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쥔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손목을 뒤흔드는 크리스토프를 잡아당겨, 리하르트는 그의 얼굴에 입을 바싹 갖다 대었다.
“크리스토프. 오늘 아침에 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한 뼘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리하르트의 얼굴을 바라본다.
“타르텐에 머무를 방을 준비해 둘 테니 언제든 편할 때에 천천히 오시라고 했지.“…―.”
“뛸 듯이 기뻐하며, 오늘 당장이라도 오겠다더군.”
크리스토프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파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응시하기만 한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놓았다. 그러나 자유를 되찾은 팔은 다시 리하르트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히 아래로 떨어진다.
“오늘과 내일은 저택에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와 있어서 번잡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모레 일찍 오겠다고 했어.”
“모레…….”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 말만 되풀이한다.
“기쁘겠군, 크리스토프. 얼마 만에 만나는 가족이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리하르트의 위에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문득 리하르트는 웃었다.
“자……,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어머니를 오랜만에 뵙게 되는데 이렇게 넋을 빼놓고 있을 셈인가?”
리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 통에 그 위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는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리하르트가 어차, 하고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해 준다.
“네 어머니는 네가 몹시 걱정이 되었나 보지. 너는 어떠냐고 물어보시길래 잘 지내고 있다고 알려드렸어. 네가 요즘 내 일을 도와줘서 아주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크게
기뻐하시더군.”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리하르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른거리는 불쾌감을 읽고, 리하르트는 천천히 손을 뗐다.
“아, 그래도 안심해. 네가 어제 처음으로 동정을 뗐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으니. ……아니, 처녀를 버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모자지간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좀 그렇잖아? 라고 리하르트가 가볍게 말하자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움찔, 입을 꾹 다물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한 불안과 울분이 깃든 그 눈을 가느스름하게 바라보다가,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옆으로 살며시 내려놓고 일어섰다.
옷차림을 정돈하며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는 그에게,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도와주지. 네가 타르텐을 잇는 그 순간까지, 네가 바라는 대로 도와주겠어.”
“호오, 그거 고맙군. 그 마음 앞으로도 잊지 말아 주면 더 고맙겠어.”
“그 대신 계승이 결정되고 나면, 나는 반드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다.”
크리스토프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하고 푸른 눈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 눈과 같은 빛깔로 질려
있는 입술도.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는 웃었다.
“좋으실 대로. 그 전까지 내 말을 잘 따르는 것만 잊지 말아 준다면, 그 뒤엔 마음대로 해 봐.”
할 수 있다면, 그 말이 뒤에 덧붙는다.
묵묵히 자신의 움켜쥔 주먹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걸음을 돌렸다. 뚜걱, 러그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잊혀 있던 구두소리가 다시 울렸다.
“일정 시간은 이미 늦춰 놨어. 그러나 더 늦출 수는 없으니 어서 준비하고 내려와. 오늘은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
냉랭한 목소리가 발소리와 함께 한 걸음씩 멀어졌다.
방문을 막 열던 리하르트는, 조금 전에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하며 돌아보았다.
“그냥 한 번 대어 본 것뿐인데 끝부분 약간 들어간 정도로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더군. 어제 한 번 맛보고 나더니 아주 민감해졌나 보지. ――아, 그래. 칭찬해 주자면, 여태 내가
맛본 몸들 가운데 가장 감칠맛이 났어. 아직 한참 덜 익긴 했지만.”
바드득, 나무바닥을 긁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남긴 리하르트는, 경쾌하게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멀찍이 어디선가 또 마른번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아도 환성이 뒤따르지 않는 걸 보니 헛방이었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쉬며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사박사박, 정강이까지 닿도록 길게 자란 풀이 가는 길을 살짝살짝 방해한다.
아직 숲이 깊어지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면 나뭇잎으로 가려진 하늘보다는 푸르게 내보이는 하늘이 더 많다여우가 다닐 리가 만무한 이 낮은 풀숲에서, 정태의는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니는 중이었다. 간간이 멀리서 말발굽 소리며 사람들이 왁자하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
총소리가 들려오곤 했지만 그런 소리들은 다 숲 깊은 곳 쪽에서 들려왔다.
머리 위에는 크리스토프의 눈동자만큼이나 새파란 하늘이 높다랗게 실려 있고, 발치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난 풀잎이 깔려 있다. 가끔씩 시야를 가리는
큼직큼직한 나무들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빼면 고요한 정적에 감싸여 있는 이 적막하고 청량한 공기도, 모두 다 좋았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 총소리만 안 들리면 참 좋을 텐데.”
정태의는 다시 한번 울리는 번개 소리에 아쉽게 혀를 찼다.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저만큼 척박하고 매서운 소리도 없을 거라고.
“자아, 어디……, 적당히 낮잠을…….”
“――자다가 뒤척여서, 여우로 오인받아 총 맞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상상하기도 싫은 소리를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사람은, 이미 정태의보다 한 발 앞서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남자였다.
얕은 숲에서는 보기 드물게 굵직한 아름드리나무 위에 편하게 올라앉아 있는 그 남자를 발견한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레이.
이놈은 어떻게 이렇게 내가 가는 곳마다 귀신처럼 나타나는 걸까. 혹시 나를 몰래 뒤쫓아 다――아, 하지만 지금은 이놈이 먼저 와 있었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뭐, 괜찮아. 여우와는 절대 헷갈리지 않을 색깔 옷으로 입고 나왔거든. 유비무환.”
정태의는 눈에 확 띄는 노란색―과연 누구의 눈에도 여우로는 보이지 않을―옷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러면서 일레이에게 말한다.
“오히려 네가 입은 그 불그스름한 옷이야말로 딱 여우 색깔이잖아. 너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 아냐?”
정태의는 까만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오늘은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위해 사냥이라는 행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행사라고 해도 자유참가나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상 젊은이들은 거의 다 사냥터로 내몰리는
형국이었다.
덕분에 정태의 역시 별로 내키지도 않는 걸음을 질질 이끌고 어슬렁어슬렁 총 하나 메고 숲으로 왔던 것이다.
일레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도 사냥을 하러 여기 왔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정태의가 늘 보았던 그 세련되고 이지적인 느낌의 차림새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편한 넉넉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장갑.
저런 차림새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혹은 총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이런 환경이라 그런지, 갑자기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몹시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살짝 눈매를 좁히는 정태의를 보고 눈치 빠르게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나무 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일레이는 입 끝을 아주 약간 틀어올렸다.
“잘 알고 있군, 태이. 내 사냥감이 너라는 걸.”
“네가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
“농담?”
일레이는 가볍게 반문했다. 그러나 굳이 더 말하지 않고 픽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다.
정태의가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일레이는 정태의를 스윽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어슬렁거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냥당하기 십상이야.”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여우로 착각할 만한 인간이라면 애시당초 사냥에 참가하지 않았겠지.”
“여우만 총 맞는 건 아니지. 누가 누구를 노리고 숨어 있을지 모르는 법이니.”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은 아무래도…….”
너야, 너, 그 말은 생략하며 정태의는 지그시 일레이를 바라본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사람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저 커다란 몸집으로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지만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거침없고 말끔한 폭력’을 위해 태어난 몸인 것 같았다.
“승계 후보자를 지켜봐야 한다면서, 너는 이런 데에 있어도 괜찮아? 사냥 솜씨 같은 것도 판단 기준이 되나, 그런데?”
“오늘은 사냥이라기보다는 접대라고 해야겠지, 리하르트에게는.”
일레이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아,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여전히 약간 걸음이 늦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움직이는 몸으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따라 사냥에 참가했다.
드레스코드를 아주 열심히 지키는 크리스토프가 사냥복이 아닌 승마복을 입은 걸 보면서, 크리스토프 역시 사냥을 할 생각은 별로 없나 보다고 짐작했다.
아까도, 어슬렁어슬렁 숲을 걸어올라 오면서 제법 멀리 떨어진 다른 숲 입구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았다. 아랍의 귀빈과 리하르트,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역시 정태의를 본 눈치였지만 곧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제 아침에 민망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 버린 게 아무래도 멋쩍었는지, 그 뒤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식당 따위에서 정태의와 마주치면 화가 난 듯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는 돌아섰다.
음……, 하긴 나도 그렇게 정통으로 삽입 상황을 보이면 부끄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 ……이미 나는 여러 번 죽었어야 하는구나, 그렇게 따지면.
정태의가 갑작스런 깨달음에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총소리가 울렸다. 몇 초쯤 뒤이어 환성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아무래도 가엾은 여우 한 마리가 희생된 모양이다.
“너도 한 마리쯤 잡아 보지, 그래. 이 부근의 여우는 질이 좋아서 비싸게 팔리는데.”
“음……, 나는 사냥 같은 귀족적인 취미가 없어서.”
“귀족적인 취미가 아니라 가학적인 취미라고 하고 싶은 거겠지. 하긴 나도 여우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도망만 다니는 걸 쫓아다니는 건 재미가 없거든.”
“아냐, 넌 뭔가 오해하고 있어.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사냥을 안 하는 건 아니거든…….”
별로 달갑지 않은 오해를 받을까 얼른 손사래를 치는 정태의였다.
그러는 동안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또다시 총성에 이은 환성이 들려온다.
무심결에 그쪽을 돌아보며,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한가롭게 숲 산책을 하다가 사냥에 말려들기라도 하면 것도 나름대로 당혹스럽겠군. ……하긴 이렇게 기슭에 가까운 곳에는 여우가 나타날 리가 없으니 여기에서 노니는 한은
말려들 일도 없겠지만.”
“흠……, 그렇지도 않아. 재수가 조금만 없으면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말려들 수 있지. 예를 들면――.”
그러나 일레이가 예를 들기도 전에, 숲 안쪽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그쪽! 그쪽으로 간다!”
“엄청나게 큰 놈이야! ……어, 잠깐, 한 놈 더 있어, 두 놈, ……아니 세 놈이잖아!”
“저쪽으로 몰아! 저쪽으로!!”
흥분에 들뜬 고함소리가 몇이나 겹쳐졌다. 그 고함 소리와 말발굽 소리, 가끔씩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총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정태의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일레이가 한가롭게 중얼거린다.
“그래, 바로 이런 상황이지.”
“잠깐,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어서 피하는 편이 낫―…!!”
그러나 정태의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이미 숲 안쪽에서는 수풀을 요란하게 뒤흔들며 엄청난 기세로 뛰어오는 짐승이 보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것은 거무스름한 진갈색의 짐승이다.
처음에 그 짐승이 여우라는 걸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몸길이가 1미터는 훌쩍 뛰어넘어 어지간한 여우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그만큼
크지는 않으나 평균에 비하면 큰 편인 여우가 두 마리 더 달려오고 있었다.
“어, ……어, …….”
그러나 문제는 여우가 아니었다.
여우는 정태의와 일레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자 그 옆으로 비껴나 달렸다.
여우보다 더 위험한 인간이, 바로 그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달리며.
피하기에는, 맹렬하게 달리고 있는 말이 지나치게 빨랐다. 게다가 그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의 마술馬術이 딱히 뛰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불운의 요인이었다.
“억……!!”
질주하는 길목 한가운데에 선 정태의를 뒤늦게야 발견한 기수는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정태의의 옆으로 비껴나 저만치 달려가는 여우를 쫓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 비키……!!”
거대한 말이 정태의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고삐를 미친 듯이 잡아당기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지만, 이미 너무 가까웠다.
젠장, 이건 재수가 ‘조금만’ 없는 경우가 아니잖아……정태의는 만사를 운에 맡기고, 몸을 최대한 낮게 낮추었다. 부디 짓밟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길 기원하면서.
그리고 눈을 꼭 감았을 때.
탕――.
바로 귓가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 총성과 동시에 소름끼치는 말 울음소리.
순간적인 정적에 이어지는, 당혹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육중하게 땅 위로 무너져 내리는 진동.
“…….”
눈을 뜬 정태의가 본 것은, 자신과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워 쓰러져 있는 하얀 말 한 필, 그리고 그 바로 뒤에서 나뒹굴며 신음을 흘리고 있는 기수.
말의 미간에 검붉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옆으로, 하얀 털이 차차 빨갛게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는 경우는 보통 없는데 말야. ……예전부터 가끔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이 너는 팔자가 조금 센 편인지도 모르겠어.”
정태의의 뒤에서 태평하게 말하며 일레이가 다가온다. 바삭, 바삭, 풀 밟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
푸들거리며 경련하다가 곧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마는 말을 잠시 망연히 바라보던 정태의는 곧 한숨을 쉬며 “팔자가 아주 드센 편인 것 같아, 내 생각엔…….” 하고 중얼거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넣어두고 있었는지, 어느새 그는 38구경 권총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옆으로 다가온 일레이는 무심하게 말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살짝 입매를 찌푸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정태의는, 말의 목 옆으로 또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구멍을 뚫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만치 멀찍이서,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라이플 장총을 늘어뜨리고, 여전히 삭막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흘끔 눈을 돌려버린다.
다각다각,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온 말은 정태의에게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다.
“……. 둘 다 고마워.”
정태의는 미묘한 공기 속에서 잠시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태의가 중얼거리든 말든, 말 위에서 크리스토프는 일레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고, 일레이 역시 평연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본다.
“쏘려면 제대로 쏘지 그랬어. 이 위치라면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지는 못한다고. 말발굽에 짓밟혀서 사람 하나 죽어나간 다음에 말이 죽어 넘어져봐야 무슨 소용이야.”
일레이는 크리스토프가 쏘아놓은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흥, 하고 코웃음 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은근히 기분이 상한 듯했다.
정태의가 혀를 차며 막 입을 열었을 때, 크리스토프가 왔던 방향에서 크리스토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돌아보기도 전에 표정을 굳혔다. 몹시 사나워진 얼굴로 흘끔 뒤로 고개만 돌린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그가 손을 까닥이는 모습이 여기에서도 보였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그리곤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돌렸다.
쏜살같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려는 그를, 정태의는 엉겁결에 소리쳐 불렀다.
“크리스!”
몇 걸음 걸어가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던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고마워. 도우러 와 줘서.”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어딘지 못마땅한 듯 침묵했다. 어느 순간 휙 말 머리를 돌리며,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던진다.
“몸조심해.”
삭막하게 노려보는 시선은 마치 ‘너 앞으로 나랑 안 마주치도록 몸 사리고 다니는 게 좋을 거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잠시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고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돌리는 눈치였지만 곧 말을 달려 가 버렸다.
크리스토프가 순식간에 멀어져 저 멀찍이 있는 리하르트에게로 돌아가고,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정태의는 멍하니 그쪽 방향을 바라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말 바람처럼 가 버렸네……. ……그런데 그 아랍 손님들 접대하는 거 아니었나?“손님을 내팽개치고 올 정도로 중요한 볼일이 있었나 보지. 어지간히 중요한 볼일이 아니라면, 버림받은 손님들이 불쾌하시겠어.”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게, 하고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던 정태의는, 에구구……하는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보았다.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행히 큰 탈이 생기지는 않은
듯한 기수가, 다리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여우를 사냥하긴커녕 애꿎게 다리만 다쳐서 돌아가게 된 그 젊은이를, 정태의는 혀를 차며 부축해 주었다.
***
“갑자기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가 했더니, 역시 저 남자인가? 잘도 알아차렸군, 그 거리에서.”
리하르트는 감탄한 듯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를 흘끔 쳐다보곤 그보다 몇 걸음쯤 앞서갔다.
“어떻게 몰라. 반짝거리는데.”
크리스토프의 무뚝뚝한 중얼거림에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말했던 것이 아닌 크리스토프는 얼마간 걸어가다가 문득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하르트가 기묘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슬쩍 낯을 찌푸리자 리하르트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다가왔다.
“반짝거린다라……, 저 남자가?”
리하르트가 물어서 크리스토프는 이번엔 짜증스럽게 그를 흘끗 노려보았다.
“네 눈에 그렇게 안 보이면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나만 보면 되니까.”
그렇게 부루퉁하게 내쏜 다음에, 생각해 보니까 릭 그놈도 보일 것 아냐, 칫, 하고 혼잣말을 투덜투덜거린다.
몇 걸음쯤 뒤에서 따라가며 희한하다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픽 웃으며 물었다.
“탱화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머리 뒤에 둥글게 후광이 비치는 건가?”
“무슨 헛소리야. 난 종교가 없어. 신은 사랑한 적이 없어.”
크리스토프의 냉담한 대답에 리하르트는 핀트가 어긋났다는 얼굴로 약간 낯을 찌푸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잠시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우울한 얼굴로 앞서가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가늘게 뜬 눈으로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눈매가 어쩐지 미묘하게 심술궂다.
“너는 누가 그렇게 반짝거려 보인 적 없지.”
“흠……?”
“그런 주제에, 너 나더러 아무도 좋아할 줄 모른다고 그랬었지.”
문득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 잠깐 창백하게 빛이 바래는가 싶던 그 얼굴은, 이내 삭막하고 무심한 표정을 떠올리며 리하르트를 냉랭하게 노려본다.
“그 뒤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렇지 않아. 난 그렇지 않아.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떤 게 좋아하는 거겠어?”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묘하게 낮아진 그 목소리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같다.
“흠……, 그럼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탱화처럼 보인다는 소리인가, 네 눈에는?”
“탱화 아니라니까!”
크리스토프는 벌컥 소리쳤다. 그런 뒤, 선심이라도 쓰듯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글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인 적은 없으니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동대에서 다른 놈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누가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이면 그 사람한테 반한
거라고 하더군.”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이면…….”
크리스토프의 말을 따라 읊던 리하르트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그렇다면 만일――.”
그러나 그렇게 입을 열던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크리스토프가 의아한 듯 돌아보았지만 그는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앞을 향해 걸었을 뿐이다.
앞뒤로 약간 비껴서 나란히 선 말 두 마리는 점차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울창하다고는 하나 말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잘 다듬어진 승마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보다는 푸른 나뭇잎이 시야를 채운다.
“가끔 들려오는 총소리만 아니면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하는 것 같군.”
불현듯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는 말에, 때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크리스토프 역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듯 눈살을 찌푸린다.
“내가 왜 네놈이랑 같이 산책을 해야 하지?“실제로 산책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 말은 옳지 않군.”
리하르트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흘끗, 그 말만큼이나 냉담한 시선을 크리스토프에게로 건넨다.
“아마도 이 근처 어디쯤 있을 테니 이제 슬슬 그들과 마주칠 때가 됐군. ……말해 두는데 크리스토프. 네가 그들을 놔두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통에 널 쫓아가느라
나까지 그들을 내버려두게 되었어. 일단 양해는 얻고 자리를 비웠지만, 집에 귀빈으로 모신 손님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짓을 저지른 셈이다. ――잊지 마. 너는 내 일을 제대로
거들어야 해. 네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두고서라도.”
“―….”
리하르트는 점점 울창해져서 가끔씩 시야를 가리며 앞길을 방해하는 나뭇가지를 손등으로 걷어내며 말을 잇는다.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들은 중요한 손님이다. ‘대단히’ 중요하지. 처음부터 이쪽이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아. ……아주 사소한 짓이라도, 긁어 부스럼
만들 짓은 하지 마라.”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굳이 대답을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이 크리스토프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막대한 차관을 변제해 왔다. 그리고 이번이 그 마지막이다. 이번 차관만 변제하고 나면 타르텐은 이제 도약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변제를 앞두고 찾아온 손님이 그들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움직일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일이란 것은 어느 사소한 구석에서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이 네 번째로 굽어진 길을 꺾어들었을 때, 저만치 나무에 가려져 있는 말 엉덩이가 보였다. 다각, 다각, 가볍게 걸어가는 걸음을 보니 그들도 정작 사냥보다는 산책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말리크! 아지즈!”
리하르트가 소리 높여 부르자 흔들흔들 걸어가던 말 엉덩이가 딱 멈추었다. 말이 방향을 돌려 돌아서자 그 위에 앉아 있는 말리크가 보였다. 길을 조금 더 돌아서자 그 옆에 있는
아지즈와, 그들의 수행원인 듯한 젊은 남자 한 명이 더 보였다.
그들에게로 가볍게 다가가며 리하르트는 다시 한번 그들을 내버려둔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말리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에서, 거의 늘 그렇듯 아지즈는 말없이
그의 옆에서 가끔 고개나 끄덕이면서 그를 거들었다. 낯선 수행원은 그들보다 한참 계급이 아래인 듯 뒤에 물러선 채 전혀 끼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여우 사냥도 좋지만 숲이 퍽 아름다워서 천천히 돌아보고 있던 참입니다. 이렇게 풍성한 녹림을 가지고 있다니 참으로 부럽군요.”
감탄하면서 울창한 나뭇잎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던 말리크는, 문득 리하르트의 조금 뒤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갑자기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셨는지요.”
“……저쪽에서 여우를 쫓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던 방향이, 아는 사람이 있던 방향이라서요.”
크리스토프는 별반 대답하고 싶지 않은 티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말리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묻는다.
“아하……, 친구 분이 걱정되셨나 보군요. 그래, 별일은 없었습니까?”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을 꺼내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서 가만히 한숨을 쉰 리하르트가 그를 거들었다.
“위험할 뻔은 했지만 사람은 다치지 않은 것 같더군요. 하긴 리그로우가 같이 있었으니 크리스토프가 가지 않았더라도 별 탈은 없었을 테지만요.”
리그로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말리크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그러면 그 친구 분이 혹시……?”
“예, 이미 아실 테지요. 정재의 씨의 동생인 정태의 씨입니다.”
리하르트는 스쳐 지나듯 이야기했다. 흘끗, 그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아지즈가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자니 상당히 건실하고 약간은 고지식한 데가 있는 분 같던데, 어떻습니까, 당신이 보시기엔?”
말리크는 눈짓으로 아지즈를 가리키며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는 글쎄요, 하고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그의 성격이나 행동 습관에 대해서라면 저보다는 크리스토프가 잘 알 테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 본인은 별 문제없이 무난한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소 까다로운
편이더군요.”
리하르트가 나직이 웃으며 말하자 말리크 역시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하하, 주위 사람들이 말이지요…….” 하고 되풀이하며 뭔가 잠깐 생각하는 눈치다.
다각다각다각다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여럿 줄지어 울렸다. 가볍게 걸어가는 말 위에 앉아 산책을 즐기는 듯이 숲으로 들어가던 말리크는 문득 나무가 조금씩 듬성듬성해지는
듯싶은 길을 둘러보다가 눈을 크게 뜬다.
“저 아래쪽에 냇물이 흐르고 있군요. 숲속의 냇물이라……. 정취도 좋으니 잠시 쉬어 갈까요.”
적당한 나무 아래 말을 세우고 훌쩍 내려서는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멈춰 섰다.
그러나 정작 냇물 이야기를 하며 멈춰 선 말리크는, 그쪽은 더 보지도 않고 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는다.
“이곳은 조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좋군요.말리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내었다.
리하르트는 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에 앉고 아지즈는 말리크의 뒤에, 그리고 크리스토프와 수행원은 앉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옆에 바로 붙어 있는 바위를 흘끔
노려보곤 뒤쪽에 있는 나무에 그냥 기대어 섰고, 수행원은 말을 돌보는 듯 말 근처에서 서성인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그 수행원을 보곤 미심쩍게 고개를 기웃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보를 다루는 분들 앞에서 돌려 말해 봐야 우스울 테니 그냥 곧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모시는 분은 정재의 씨를 저희 사업체로 모시기를 무엇보다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분은 이미 UNHRDO에 소속되어 있고, 그를 설득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타르텐 쪽에 변제 조건으로 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리크가 꽤 단도직입적으로 꺼내는 그 이야기는 이미 타르텐 측에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리하르트는 내색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뒤에서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있던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타르텐 내부에서 이야기가 오갈 때 크리스토프도 그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알 파이살이―정확히는 그의 피후견인이―정재의를 자신의 사업체와 연계해 독자적으로 두고 있는
연구소에 데려오고 싶어한다고.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의라는 이름은 이미 일부에서는 하나의 절대적인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비단 그에게서 뭔가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만으로도 그
연구소는 매우 유효하게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 당시, 몇 년 전과는 달라졌다.
당시 권력을 두고 한창 암투에 휘말려 있던 알 파이살의 동생, 알리 왕자는 작년 외무장관직에 취임하면서 그 권력다툼의 끝을 알렸다. 이후에 그의 앞날을 방해할 이는 없을
터였다.
이미 권력을 등에 업은 알 파이살 역시 정재의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의 값어치는 예전만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정재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과연 저렇게까지 해서 얻어서 수지타산이 맞을까 싶을 만큼 막대한 공세를 퍼부으면서.
타르텐 내부에서도 의아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정재의에게 다른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런 의견도 분분했다.
결국 결론은 나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알 파이살이 정재의를 원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달리, 독자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타르텐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은 뭐가 있을까. 그걸 생각하다가, 아직 갚아 주지 못한 빚에 결론이 이르렀습니다.”
크리스토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동안에도 말리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 리야드에 정체불명의 폭격이 일어났던 것은 기억하시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드릴 것 없이, 어쩌면 저희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실 테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때에는 타르텐마저도 거의 뒤집어졌었다.
리그로우가의 둘째 아들이 미친놈이라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대대적인 미친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리야드의 테러를 주도한 것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날 타르텐의 제1정보국에서 제6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정보국이 밤새도록 총동원되었다.
그 당시 크리스토프는 이스라엘 정부군과의 단기계약으로 레바논에 불려가 헤즈볼라와 대치하고 있었기에 그 소식과는 동떨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야 ‘릭이 정재이를 구하기 위해 리야드를 폭격하고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의 별저까지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좀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정재의라는 인간이 온갖 수많은 인간들이 눈을 벌겋게 하고서 탐내는 인재라는 말을 크리스토프도 들은 바 있었지만, 그렇다고 릭이 그 사람을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은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그가 정작 구출하려 했던 건 천재 정재의가 아니라 그 옆에 덤으로 딸려서 덩달아 붙잡혀 있었던 범인凡人 정태의라는 걸 알게
되어 풀렸다. 그러나 다시, 그럼 그 정태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해서 구했느냐는 의견이 또 분분했지만, 그 의문 역시 다시 곧 풀렸다.
그 정태의라는 인간을 꿰어차고 나란히 손 붙잡고―소문으로 듣기에는―베를린으로 가서 들어앉았다는데,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당시 일시적으로 정태의라는 이름은 옛 T&R 기동대며 타르텐 정보국을 비롯해 릭이라는 미치광이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공식 인기명 1위에 올랐다.
‘왜 베를린에 감춰 놓고 그렇게 싸고돌아. 얼굴 좀 보여 주지.’
몇 년 전 리그로우와 잠시 마주쳤을 때 정태의라는 이름을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리그로우는 선뜩하게 웃으면서 싸늘하게 말한 바 있었다.
‘닳아.’
“…….”
갑자기 그때 리그로우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프는 눈에 불을 켰다.
그 당시에는 이놈이 미쳤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까 화가 치민다.
그래서 그렇게 꽁꽁 숨겨 뒀었냐. 그럼 지금쯤 그 녀석 얼굴에는 이미 구멍이 수백수천 개쯤 숭숭 뚫리고도 남았겠다.
공연히 속이 뒤틀린 크리스토프가 속으로 툴툴거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말리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나 그 범인들 가운데 정재의 씨의 동생이 있다는 점에,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관심을 보이셨지요.”
사뭇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말리크를, 크리스토프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내려다보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게 필요할 때가 있는 줄은 알지만, 온갖 정보가 다 들어오는 위치에 있는 인간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다.
“범인들 가운데 정재이의 동생이 있는 게 아니라, 정재이의 동생을 범인 대열에 끼워 넣은 거지…….크리스토프는 코웃음 대신 무뚝뚝하게 불쑥 중얼거렸다.
워낙 작은 소리라 그들에게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있던 리하르트는 조용히 크리스토프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만다.
그 뒤로도 얼마간 말리크의 말이 더 이어졌으나 크리스토프는 거의 듣지 않았다. 알 파이살이 정재의를 맞아들이길 원하든 말든, 그런 데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래서 가능하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태의 씨의 협력을 얻어내어 서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의견을 타진해 보자 아무래도 힘들 것 같더군요. 제가
모시는 분께는, 그런 경우에는 적정한 수준의 강경한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미리 지시하신 바 있습니다.”
말리크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멀찍이서 흘러가는 물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설핏 얼굴을 굳혔다. 눈동자만 돌려 말리크를 바라본다.
리하르트는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다가, 말리크가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자 그제야 가만히 입을 뗐다.
“그 말씀은 즉, 어떠한 류의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정태의 씨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말리크는 빙그레 웃었다. 그 뒤에서, 아지즈는 무뚝뚝한 가운데서도 은연 중 불편한 기색을 풍기며 슬쩍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 타르텐의 손을 빌리시렵니까?”
리하르트가 다시 묻자, 말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지금 당장은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차관의 변제 방법은 저희들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니 충분한 의논을 거친 후 제가 모시는 분께 그 이야기를 전해 드리게
되겠지요. 아마도 의논을 마치면 거기에서 크게 다른 결과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요. 지금은 일단 차관 변제보다는, 그에 앞서 사소한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손을 저으며 웃던 말리크는 마지막 말을 할 때에야 짐짓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말씀은……?”
리하르트가 되묻자 말리크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오늘 이렇게 고맙게도 사냥 자리를 열어 주셨는데, 어쩌면 제가 데려온 이들 중 하나가 약간 실수를 해서 사람을 조금 다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르텐의 영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면 몹시 안타까운 일일 테지만, 모쪼록 너그럽게 양해를 해 주십사 하고요. ……아아, 물론 그런 불운한 일이 과연 벌어질지는 알 수 없고
벌어지지 않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고 부드러운 그대로였지만,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크리스토프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말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그 뒤에 선 아지즈에게로, 그리고 얼마간 떨어져 말을 돌보고 있는
수행원에게로 옮겨갔다.
검지와 중지의 마디 위에 박인 굳은살. 두툼한 베스트 안쪽으로 약간 불룩하게 솟은 모양새는, 사냥에는 적합하지 않은 단총.
리하르트의 시선 역시 잠시 그 수행원을 훑었으나 모른 척 다시 말리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눈은 조금 난처한 듯하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속을 모를 눈이다.
“불상사라……, 저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정말이지 불운한 일이겠군요.”
하하, 하고 곤란한 듯이 웃으며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리하르트의 태도는, 내키지는 않으나 모르는 척 묵인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그때였다.
“적정한 수준의 강경한 방법이라면, 어느 정도가 적정한 수준이신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여태 대화에 거의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해 오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묻는 말에, 일순 말리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빙긋 웃음 짓는다.
“하하……, 생명에 지장이 없고 평생 지속될 장애를 주지 않을 정도라면 적정하겠지요.”
크리스토프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잠시나마 리하르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감정을 감춘 그에게 그는 말없이 이르고 있었다.
너는 내 일을 거드는 입장이다. 방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야.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집스러울 만큼 뚫어지게 그 수행원의 손가락만을 본다. 크리스토프만큼이나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익숙한 손가락이다.
리하르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말리크를 돌아보았다.
“불운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지만, 피치 못할 경우라면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리하르트의 조용한 말에 말리크는 매끄럽게 웃었다.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렇다면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우리도 슬슬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붉은 여우를 잡아 본 지는 무척 오래 되어 기대가 됩니다.”
말리크는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 역시 뒤따라 일어나는 가운데, 말리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돌보고 있던 수행원이 그 시선을 눈치채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짧은 눈짓이 오갔을 뿐이다.
말리크는 그 수행원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웃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는 아주 솜씨가 좋은 사냥꾼이지요. 우리와는 따로 움직일 겁니다. 그도 근사한 여우를 잡아오면 좋겠군요.”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 수행원을 바라보다가, 그가 목례를 남긴 뒤 훌쩍 말에 올라타 떠나려 할 때 문득 입을 열었다.
“사냥터에는 여우뿐 아니라 가끔 사나운 맹수도 나오니 주의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맹수이지요, 하고 덧붙이는 리하르트를 수행원은 잠깐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맹수라…….”
말리크가 미묘하게 중얼거리며 쓰게 웃는다.
“사정거리를 둔 사냥터에서는 사냥꾼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법이지요.”
말리크는 낮게 중얼거리곤 흠, 하고 한숨을 쉬더니 일단락을 지었다는 듯 돌아섰다.
“그럼 우리도 이만 출발을…―.”
그러나 말을 꺼내던 그는, 돌아선 순간 입을 다물었다.
리하르트의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정확한 조준도 없이 장난을 치기라도 하는 듯, 긴장한 빛도 없이 아무렇게나 손에 쥔 총은 정확하게 말리크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여남은 거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리크는 일순 낯빛이 변했지만 곧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크리스토프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보인다.
“아주 손질이 잘 된 총이로군요. 여우를 잡을 총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말리크의 말에, 크리스토프를 등지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당장 뒤를 돌아보는 그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눈 하나 까딱 않고 말리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달칵,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저 남자가 들고 있는 것도 여우 사냥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총이지.”
크리스토프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방아쇠에 가볍게 걸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크리스토프, 그 총 내려.”
리하르트가 낮으나 사납게 말했다.
숲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런 얼굴은 보기 힘들었다.
험악한 빛을 시선에 고스란히 담은 그가 나직이 크리스토프를 다그친다.
“크리스토프. 약속을 잊은 건 아닐 테지.”
“……. 맹수가 한 번 그놈을 구해냈으면, 이번에는 내 차례야.”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 막 출발해 멀어지고 있던 수행원이 뒤쪽에서 벌어진 미묘한 술렁거림을 깨닫고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크리스토프의 손에 들린 총을 본 순간.
반사적으로 베스트에서 총을 뽑아드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총구를 아주 약간 옆으로 기울여 겨누었다. 동시에 검지를 가볍게 튀겼다.
짧고 메마른 소리.
말리크의 바로 옆을 스쳐 가는 조그맣고 치명적인 납 조각.
아무도 말마디를 뱉어내지 못하는 찰나의 정적.
그리고 그 뒤에.
기괴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심장 약간 아래, 수행원은 자신의 몸통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듯 기괴하고 의아한 신음을 조그맣게 흘려내던 그는, 이윽고 눈을 부릅뜨며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꺼내어 든 총으로 크리스토프를
겨누었지만 늦었다. 총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도 구멍이 하나 더 뚫린다.
“……!!”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사태에 침묵했다. 그런 가운데, 수행원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 흙바닥 위에 뒹구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면서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이런……, 집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에게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다니, 정말이지 불운한 사고로군.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책 읽듯이 고스란히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총을 쥔 손을 내렸다.
말리크는 약간 핏기가 가신 얼굴로, 낮은 신음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아지즈 역시 침중한 얼굴로 수행원을 쳐다보다가 크리스토프에게 험악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일순 표정조차 잃어버렸던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
그러나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자신을 바라보는 말리크를 무심하게 마주보며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생명에 지장이 없고 평생 장애가 없다는 건 이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
뭔가 말하려 하던 말리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도 이미 웃음기는 씻은 듯 가셔 버렸다.
서둘러 수행원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피는 아지즈에게 흘끗 눈길을 주자, 아지즈는 신중하게 상처를 살핀 뒤 말리크에게 눈짓을 했다. 말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즈는 지체 없이 수행원을 말에 태우고 자신도 그 뒤에 함께 올라탔다. 서둘러 말 머리를 돌리던 아지즈는, 험악하게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이 어리석은 짓에 대한 대가는 너 혼자만 받고 끝나지는 않을 거다……!”
선명한 분노를 심어 그 말만을 남긴 그는, 말을 달려 급하게 떠났다. 조급한 말발굽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세 사람과 함께 정적만이 남았다.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한 답변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군요.”
이윽고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말리크였다.
늘 서글서글한 얼굴로 뭔가 말을 할 때면 으레 빙그레 웃곤 하는 그는, 일말의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얼음처럼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타르텐에서 이런 식으로 도와주실 줄도 몰랐습니다.”
말리크가 조용히 억누른 목소리로 말하자, 크리스토프의 입매가 움칫 움직였다.
타르텐이 아니다. 크리스토프라는 개인이 벌인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말은 먼지만큼의 무게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씨. 귀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타르텐, 그 이름에 악센트를 넣어 말리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깊이 고개를 숙인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말리크만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 얼굴은 무표정마저 사라질 만큼 놀라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아는 한 리하르트는 어르신이나 집안의 어른들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사과를 할 만한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거니와, 그는 결코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사람 좋게 다정한 웃음을 짓고는 있으나 그것이 그의 본성이 아니라는 걸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서투르게 드러나지 않는 그의 자존심이 사실은 얼마나 드높은지도.
그런 리하르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인해.
크리스토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꽉 맞물린 입술이 약간 비틀린다.
말리크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하르트를 냉랭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얼음 같은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개인은 물론 제가 모시는 분도, 제가 몸담고 있는 곳도 타르텐을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지금과 같은 관계가 맺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고도 내밀한 이야기까지 터놓고 상담을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
“그것이 설령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개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그 집단이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말리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얼핏 고요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그 목소리는 굳게 닫혀 있다. 그 안에는 분노와 적의가 맺혀 있었다.
한낱 수행원이라 하나 자신의 동료이다. 타국까지 함께 온 동향의 동료가 상상치도 못한 일로 크게 다쳤다. 그들의 기질은 온건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어떠한 경위로든 저희 사람이 다쳤군요. ……말씀하신 대로 매우 불운한 일입니다. 심지어 중요한 일을 앞둔 지금 말입니다.말리크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언짢은 빛이 억누른 말꼬리에 희미하게 배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숙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침중하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이 일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고 정식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리하르트 타르텐이라는 이름으로, 귀하께 용서를 빕니다.”
――리하르트 타르텐이라는 이름으로, 귀하께 용서를 빕니다.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순간, 크리스토프는 무심결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목에 칼을 들이대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그런 말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갈 날이 있을 줄도 몰랐을 게 틀림없었다.
차갑게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던 말리크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는 문득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사납게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크리스토프는 말리크를 쳐다보았다. 그 내쏘는 시선을 말리크가 마주본다.
“빚은 준 대로 고스란히. ……그렇다면 제가 책임지고 갚을 빚은 이거면 될 테지요.”
크리스토프는 총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말리크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그런 그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서슴없이 자신의 심장 약간 아래, 아까 수행원의 몸이
꿰뚫렸던 바로 그 자리에 총구를 대었다. 그리고 말리크를 바라본다.
말리크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다.
어쩌면 크리스토프가 설마 스스로를 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그 빚을 그대로 받아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말리크는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좋을 대로 해 보라는 듯 눈짓을 했고,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 정도는 생각했었다. 그 대가를 자신이 치를 생각도 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막 검지를 당기는 순간이었다. 무서우리만치 싸늘하게 그를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그 순간 크리스토프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서, 그의 팔을 세차게 걷어내어
버린다. 그리고 곧 연이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탕!, 떨쳐진 손으로 내쏘아버린 메마른 총소리는 나무등걸에 박혔다.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후려갈긴 리하르트의 앞에서, 미처 방비하지 못했던 크리스토프는 두어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곧 자신이 맞았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휙
치켜들며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말리크의 앞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은 리하르트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닿을 듯이 숙인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뻔뻔하다 여기실 테지만 맹우를 아끼시는 마음으로 제 심경도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록 성품이 급하고 모질다 하나 제 혈연입니다. 사람 둘이 상하지 않도록,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리하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꾹 다문 단단한 턱이 잠시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하신들 맹우가 크게 다친 분은 풀리지 않으실 테지만 모쪼록 그것이 오래도록 이어온 관계에 흠을 만들지 않도록,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말을 마친 뒤 다시 이마를 바닥에 댈 듯이 숙이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일어나.”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말리크도, 리하르트도 침묵하고 있어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만이 울렸지만, 그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인 앞에서, 말리크는 조용히
리하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인에게 용서를 청한 적도, 그렇듯 내려다보인 적도 없을 남자가 흙바닥을 짚고 엎드려 있었다.
“리하르트. ……일어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살아 있는 것은 크리스토프 한 사람뿐인 듯, 다른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운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다. 내가 벌인 일에 왜 네가 멋대로 나서고 있어……! 너는 비켜!! 내가, 한 대로 받을 테니!”
“……크리스토프. 네가 네 가슴에 대고 총질을 하는 걸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보나?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내가 네게 받을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타르텐의
이름을 가진 주제에, 그 이름을 멋대로 휘둘렀다는 것이나 그 머리에 똑똑히 넣어 둬.리하르트는 나직이, 악문 잇새로 거칠게 내뱉었다.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사납게 뿌리치고, 말리크에게 돌아섰다.
다시 흙바닥 위에 무릎을 짚는 리하르트에게, 그때까지 말이 없던 말리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뜻은 잘 알았습니다.”
여전히 냉랭하고 쌀쌀하나 조금 전과 같은 분노는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말리크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타르텐과의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리하르트 타르텐이 어떤 남자인지.
지금 리하르트 타르텐이 말리크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대는 모습을, 과연 그를 아는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제가 오히려 황송하니 그만 일어서 주십시오.”
말리크는 뒤늦게야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리하르트를 부축하는 시늉은 하지 않는 그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과 허리를 펴고 일어선 리하르트는 참담한 모습이었다.
바지 무르팍에, 바닥을 짚었던 손과 소매에, 이마와 머리카락에, 흙이 누렇게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그가 흙바닥에 머리를 묻었던 사실을 명확하게 되새겨 준다.
“이번 일은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나, 이런 일로 오래도록 쌓아 온 친분이 무너져서야 저희로서도 아쉬운 일입니다. 이번 일은 차후 따로 그에 상응하는 해명을 받을 것이되,
곧 돌아오게 될 변제에 있어서는 문제를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께도 그렇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리하르트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말을 마친 뒤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듯 말리크는 잠시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지만, 곧 걸음을 돌렸다.
“그러면 저도 그가 걱정되니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처럼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끝까지 즐기지 못해 죄송하군요. ……그러나 사냥을 즐길 날은 오늘만이
아니니,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즐기도록 하지요. 그때에는 불운하고 무익한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약간 소리를 낮춘 마지막 문장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크리스토프는 이내 깨달았다. 오늘 하루 정도만 훼방을 놓아 봐야 앞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너는 그저 바보짓을 했을 뿐이라고, 말리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리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를 일별하곤 곧 말머리를 돌렸다.
비록 일단은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하나 여전히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말리크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숲 바깥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는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곳에는 침묵이 남았다.
“…―.”
크리스토프는 입을 꾹 다문 채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꿈치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누가 네 멋대로 끼어들라고 했어. ――누가, 너더러 그렇게 비참한 꼴로 용서를 구걸하라고 했냐고.”
크리스토프는 격앙된 목소리를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그제야 리하르트는 흘끗, 눈동자만 돌려 크리스토프를 본다. 그 시선 속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던 리하르트는, 그 손등에 묻어나온 흙을 잠시 말없이 노려보았다.
자신의 이마에 흙이 묻게 되는 것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그는, 몇 초간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않고 지그시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등을 돌렸다.
시내 쪽을 향해 비탈진 언덕을 성큼성큼 내려가며, 리하르트는 거칠게 재킷을 벗어 바위 위에 집어던졌다. 흙이 묻은 바지도, 셔츠도 벗어 재킷 위에 내팽개치는 손길이 사납다.
억누른 울분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크고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는 시냇가에 다다랐을 때, 이미 리하르트는 옷가지를 모두 집어던지고 냇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몸을 담갔다고 해 봐야 허벅지 가량까지 올 뿐이라, 허리를 굽혀 온몸을 물로 적셨다. 물살로 후려치는 것처럼 얼굴이며 팔 따위로 세차게 물을 끼얹던 그는, 어느 순간 물속에
첨벙 잠겨들었다.
그리 깊이 않은 물 안에 온몸을 담그고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냇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원하지 않았다. 거의 충동적으로―그러나 머리 한구석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그 남자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에도, 크리스토프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기껏해야
자신도 같은 보답을 받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저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결코 그런 걸 보려고 한 게 아니다.
크리스토프가 이를 악물고 수면을 노려보는 가운데, 한참 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잠겨 있던 리하르트가 어느 순간 물보라를 일으키며 일어섰다. 촤악, 수없는 물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한가운데, 그 물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시내 바로 옆에 서 있던 크리스토프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난 너한테 그런 짓을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
리하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었어. 같은 상처로 보상이 안 된다면 심장이든 머리든 쏘아 주면 되는 일이었다고. 타르텐을 짊어진 네가 무릎을 꿇지 않아도!”
크리스토프가 외쳤다.
그때, 크리스토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물 밖으로 나오고 있던 리하르트가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네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었다……? 심장이든 머리든 쏘아서?”
그렇게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문득 하……,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냉랭한 시선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 심장도 머리도 이제 내 것이겠군.”
“웃기지 마. 나는 부탁한 적 없어. 차라리 총으로 쏘아 버릴 수는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넘겨줄 건 아냐.”
크리스토프가 거칠게 내뱉는다. 애초에 진지하게 말한 게 아닌 리하르트는 곧 시선을 돌려 물 밖으로 나왔다. 그의 걸음 아래로 물이 고였다.
“네가 그럴 이유는 없었는데. 네가. 타르텐을 이어야 할 네가. ―…그렇게 꼴사나운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단 말이다.”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타르텐의 모든 이가 그런 것처럼, 설령 떠나 있더라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해도, 타르텐은 그의 기둥이다.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그때다.
옷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리던 리하르트가 문득 멈칫했다.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돌아본다. 그 눈에 새카맣게 빛을 잃은 울분이 담겼다.
“꼴사납다? ―…꼴사나워도 할 수 없지. 너도 타르텐인 바에야 눈앞에서 네가 죽는 꼴을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으니. 수십 년의 변제가 이제야 끝나려는데, 그걸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그들과 척을 져서 앞으로의 비상飛上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악문 잇새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나직이 속삭이듯이 시작한 말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서슬 퍼렇게 억누른 고함이 되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한 걸음 한 걸음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불길 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본다. 독이 흘러나올 것 같은 혀가 말을 쏟아내었다.
“고개는 얼마든지 숙일 수 있어. 필요하다면 머리를 땅에 박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할 수 있어, 얼마든지! 그래야만 한다면!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절대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다! 내 머리를 으깨어 버린다 해도!”
리하르트는 커다랗게 외쳤다. 그 커다란 외침과 무섭게 굳어 있는 얼굴은 자신의 굴욕을 성내고 있었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네 그 알량하고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런 바보짓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어. 타르텐이 손해를 볼 일도 없었지!
그래, 보상! 오늘 네 그 얼간이 짓 때문에 어느 정도나 손해를 보게 되었는지 알고는 있나? 모를 리가 없겠지!”
“――내가, 갚으면 되잖아!”
크리스토프는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외쳤다.
“내가, 처음부터 내가 그럴 생각이었어! 그 자리에서 내 머리를 날려 버리면 되는 문제였어! 네가 나를 위한답시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어!”
크리스토프는 성을 내며 외쳤다.
화가 났다.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그러나 분을 못 이겨 단숨에 말을 쏟아내고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어느새 분을 갈무리하고서 냉막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냉막한 게 아니다. 지독한 울화와 분노가 쌓여 얼어붙은 거다.
“그래……, 그럼 차라리 얘기가 빨라지겠군. 갚아.”
리하르트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한 걸음,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와 있던 그가 다가오자,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디면 또 한
걸음 더.
“갚……지, 갚겠어.”
크리스토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돈 따위는 필요없어. 어차피 타르텐의 이름으로 나갈 사죄금이다. 돈 같은 건, 차관 변제를 끝내고 나면 쓸어다 버려야 할 만큼 들어올 테니까 그런 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럼, 뭘――.”
“내 굴욕만큼의 네 굴욕.”
리하르트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대답을 잃었다.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겠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좀 더 쉽게 말해 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짓을 했으니, 너에게도 마찬가지의 것을 받아낼 거다.“―…. 마찬가지의 것, 이라니.”
크리스토프는 움칫 눈살을 찌푸리며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리하르트가 한 걸음 더 다가왔을 때, 이미 크리스토프의 뒤는 시내였다. 한 걸음 더 물러서던 크리스토프는 발뒤꿈치에서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땅과 물의 경계에
섰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하르트는 손을 뻗었다. 그대로 물속에 밀어넣을까 싶어 일순 발밑을 확인한 크리스토프였지만, 그 손은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닿는 순간 흠칫, 반사적으로
뿌리쳤지만 풀려나가지 않을 만큼 단단히.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표정마저 사라진 얼굴로 말없이 그를 노려만 보는 눈동자가 얼음처럼 파랗다. 뭐라고
달싹거리다가 닫히는 입술도 눈동자만큼 파랗다.
크리스토프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움켜쥐고 있는 그 감각이 못내 싫은지 가끔 알아채기 힘들 만큼 팔의 근육이 움츠러드는 게 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문득 리하르트는 잡고 있기도 싫다는 것처럼 뿌리치듯이 크리스토프를 내팽개쳤다.
균형을 잃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물속으로 철벅이며 들어서던 크리스토프는 물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박혀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첨벙, 요란한 물소리가 나며 물보라가 튀었지만,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지만 물이 쿠션이 되어 아프지도 않다.
물보라가 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크리스토프는 몇 걸음 떨어진 정면에 선 리하르트를 사납게 올려다보았다.
서너 걸음, 딱 그 거리만큼 떨어져서 물가에 서 있던 리하르트는 물속에 넘어져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선다.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리고 그는 크리스토프를 얼마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빨아.”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한 듯했다. 의아한 빛이 얼굴 위를 스치는 것도 잠시, 이내 크리스토프의 표정에 경악 섞인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자신의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을 부정하듯 가만히 고개를 젓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그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크리스토프의 코끝에서 두어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리하르트의 벗은 몸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사타구니 가운데, 무겁게 늘어져 흔들리는 거뭇한 살덩이가.
크리스토프의 경악스런 시선이 그곳에 꽂히는 것을 내려다보며, 리하르트가 아주 약간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그 물건에, 크리스토프는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라도 본 듯이 움찔 뒤로 고개를 물렸다.
“빨아.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서서히 들어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금세라도 깨어질 유리처럼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친 놈, 이 변태 새끼……! 누가 그런 더러운, ――싫어.”
창백한 입술을 비집고 욕설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리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에 그 입으로 분명히 갚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
“말했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짓을 고스란히 받아내겠다고. ……하. 아래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더럽다고 낯빛을 바꾸는 네게 말야.”
아무 말도 못하고 해쓱한 얼굴로 노려만 보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더러운 걸 입에, ……느니 차라리 목에 칼이 꽂히는 편이 나아. 절대로 싫어.”
크리스토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말은 예상한 듯,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픽 웃었다.
“나는 그 끔찍하게 하기 싫은 짓을 했는데, 너는 못하겠다? 그래서야 곤란하지. ……크리스토프, 너는 중요한 걸 잊고 있어.”
리하르트는 아주 약간 더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그만큼 크리스토프는 다시 몸을 뒤로 움츠린다.
“너는 날 도와야 한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어. 돕긴커녕 도리어 그 반대였지. 약속의 조건이 뭔지 잊었나?”
리하르트가 은근히 묻는 순간,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삽시에 굳었다.
“네 어머니가 뛸듯이 기뻐하며 달려오겠다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도 잊었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리하르트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냉랭한
얼굴 그대로 나직이 말했다.
“크리스토프.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넌 물론이고 네 어머니가 타르텐의 저택에 발을 들이는 것 역시 몹시 언짢아. 한 번 쫓겨난 자는 평생 그 밖에 있어 마땅하다.
원래라면 그녀는 드레스덴의 땅을 밟아서도 안 되는 몸이야.”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비겁한 협박이다. 비열하고 더럽다. 심지어 리하르트는 흥분을 해서 크리스토프에게 윽박을 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성기는 무겁게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그는 오로지, 크리스토프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졌다. 마치 인형처럼 창백해지는 그의 위로,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빨아.”
“……싫, 어. ……못해.”
물 흘러가는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를 잘도 알아듣고, 리하르트는 낮게 코웃음 쳤다.
“‘못해’? ‘안 해’보다 낫군. 크리스토프. 세상에는 못할 짓 따위는 없어. 나는 조금 전 끔찍할 만큼 싫어하는 네놈이 저지른 잘못을 대신해서 흙바닥 위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는데, 너는 무슨 짓을 못한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거친 분노가 서렸다.
그러나 곧 스스로도 깨달은 듯, 그 분노를 삭이려는지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랬다. 가끔 크리스토프를 상대하다가 거친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늘 침착하고 온유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있어야 했다.
이미 조금 전 물로 뛰어들 때까지의 그 거친 모습은 많이 가셔 있었다. 물속에서 엉망으로 뒤틀린 분노를 반쯤 재우고 나와, 나머지 반을 지금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리하르트는 곧 다시 냉랭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 ――빨아.”
크리스토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살덩이를 넋 나간 듯 창백한 눈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서슴없이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고 벌린 그는, 다른 손으로 크리스토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흠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를 용서 없이 끌어당겼다.
“그, 싫……!!”
무섭게 눈을 홉뜨고 몸을 뒤트는 크리스토프를 억누르며, 리하르트는 억지로 벌린 그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넣었다.
“잘 들어, 크리스토프. 살짝 깨무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내일 네 어머니가 타르텐의 문밖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게 될 거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저주와도 같이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는 분명 크리스토프의 귀에 닿았다.
그는 입속으로 파고드는 그 살덩이를 뱉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단단히 움켜잡은 손이 머리를 고정시킨다.
“……! ……!!”
요란하게 요동치는 물소리가 났다. 짓눌린 신음과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뒤섞여 물소리에 섞인다.
“말해 두는데, 나는 네 입속에서 사정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빼주지 않을 거다. 네가 피하려 들면 들수록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있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니까 똑똑하게 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 좋을 거야,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려 안간힘을 쓰는 크리스토프의 머리를 어렵잖게 휘어잡은 채 말했다.
입 안에 들어온 뒤로 약간 단단해진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무겁게 늘어져 있는 그 성기는, 고작해야 반 정도나 입에 담겼을 뿐이었다. 그 나머지를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어넣어,
크리스토프는 곧 숨을 쉴 수가 없어졌다.
괴로웠다.
목을 찌르며 깊이 파고드는 성기 때문에 구역질이 났고, 숨이 막혔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고이자 입 안의 살덩이가 더욱 질척거리는 것 같아 속이 메스껍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조차 안 된다.
“크리스토프. 간밤에는 잘 잤나?”
문득 리하르트가 던지는 그 뜬금없는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꼼짝도 못하는 머리로 눈동자만 치켜올려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어제도, 그저께도 거의 못 잤어. 네 몸이 어떤 맛인지 맛본 뒤로, 계속 감촉이 남아 있더란 말야. 손바닥에서 네 허리가 미끄러지던 감촉이나, 내 가슴에 보드랍게 비벼 대던
네 등의 감촉이나, 내 손가락 사이에서 뾰족하게 솟던 네 젖꼭지의 감촉이나, 내 페니스를 통째로 삼켜서 오물거리던 네 아랫도리의 감촉이나. 게다가 무엇보다도, 네가,
크리스토프, 그렇게 울면서 힘들어하는 모습까지. ……밤 내도록 그 감촉들이며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몇 번은 더 쌌어. ……아, 그래, 이제 조금 느낌이 오는군.”
리하르트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동안, 크리스토프의 입에 담겨 있던 성기가 점점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추삽질을 시작한다.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갑자기 목구멍으로 치고 들어오는 살덩이의 감촉에, 크리스토프는 사레가 들고 말았다.
폐가 끊어질 듯 괴로워 기침을 하려 했지만 재빨리 알아챈 리하르트가 그의 턱을 움켜쥐고 벌린 채 놓아주지 않는다.
“말했을 텐데, 깨무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 말라고. 크리스토프, 제대로 빨지 않으면 이대로는 오늘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거다. 그나마 이제 발기는 됐으니까 너는 핥고
빨기만 하면 돼. ……어서 해.”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에 맺혔다. 크리스토프는 숨을 허덕이며 고개를 젓는다“크리스토프, 모르겠나? 이제부터 당분간 이건 네 일과가 될 거야. ……그래도 결벽증에 접촉기피까지 있는 그 정신병이 가엾어서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손대지 말고 봐줄까
했었는데, 오늘 아주 확실하게 그 마음을 씻어 줬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입 앞에서 천천히 허리를 추어올렸다. 목을 찌르는 깊이가 점점 더 깊어졌다. 문득 리하르트가 혀를 찼다.
“한 번 할 때마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니면 매일같이 몇 시간 동안 내 물건을 입에 담고 있고 싶나?”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약간이나마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성기를 머금은 크리스토프의 뺨 위를 문지르며,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차갑게 웃는다.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나? 크리스토프.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까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는 대신에, 그 자들 셋과 함께 너까지 죽여서 거기에 파묻어 버릴까 진지하게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나? 아마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거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일은.
……그러니, 너에게도 딱 그만큼만 받아내겠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과 감각을, 네 몸속에 심어 주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리하르트는 나직이 덧붙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밤마다 아래에 박아 주지 않으면 허전하다 못해 욱신거리는 몸으로 만들어 줄 테니. 아, 그래. 몸에 확실하게 새겨 준 다음엔, 네가 타르텐에서 떠날
때에는 특별히 선물도 근사한 걸로 준비해 주지. 밤마다 아랫도리를 채워 줄 모형이라든가.”
“…―!”
크리스토프가 요동쳤다.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몸 때문에 물방울이 튄다. 그 물방울이 얼굴에 튀고 눈에 들어가 숨이 막히고 시야마저 가려져도, 크리스토프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깨물어 버리려 해도,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넣고서 턱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이러고 있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사냥을 마친 자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마음껏 내 페니스를 맛보고 싶다면.”
“……! ……!!”
“그렇지 않으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는 조용히 말했다.
리하르트의 다리를 쥐어뜯으며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현실을 깨닫는다. 그 현실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토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금세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이 남자는 크리스토프가 설령 구토를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성기를 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끝까지 그렇게 있다가, 다 토했으면 어서 계속하라고 말할 게
틀림없었다.
차라리 그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언제였든, 그가 끔찍하리만치 미웠던 과거의 언제였든 그를 죽이고 말았어야 했는데.
크리스토프는 울었다. 목을 찔러 구역질이 나고 호흡이 막히는 탓의 생리적인 이유와, 그보다 더한 분노, 울분, 수치 따위가 머릿속까지 새카맣게 태우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이 남자를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나 마음속 깊이 탄식하면서도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국 그는 드레스덴을 떠나기 전까지는 리하르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말은 무엇이든 거스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이유로, 그와 약속한 바에 따라 타르텐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크리스토프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입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뜨거운 살덩이에, 떨리는 혀를 가져다대었다.
그 새카만 수치와 굴욕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의 기억을, 크리스토프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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